유로 2012 C조는 예상대로 스페인과 이탈리아가 8강에 진출했습니다. 스페인은 2승1무, 이탈리아는 1승2무를 기록했습니다. 본선 2차전까지는 이탈리아가 스페인-크로아티아와 비기면서 8강행을 장담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약체 아일랜드와의 3차전에서 2-0으로 이기면서 2010 남아공 월드컵 조별 본선 탈락의 악몽을 되풀이하지 않았습니다. 스페인은 본선 3경기를 치르면서 전술적인 약점이 없지는 않았지만 우승 후보답게 쉽게 무너지지 않는 저력을 발휘했습니다. 이 글에서는 스페인의 최대 화두였던 제로톱에 대해서 언급하려고 합니다.
스페인 제로톱, 진화한 전술? 대체 전술?
사람들이 유로 대회에 주목하는 이유는 현대 축구의 전술적인 트렌드가 얼마만큼 진화할까 기대하는 심리가 있습니다. 유로 2008 이전까지는 잉글랜드 특유의 빠른 템포 축구 내지는 강력한 압박이 대세였습니다. 유로 2004 우승팀 그리스, 2006 독일 월드컵 우승팀 이탈리아의 공통점은 선수들의 파워와 끈질긴 몸싸움, 상대팀에게 침투 공간을 내주지 않으려는 압박 축구로 재미를 봤습니다. 유로 2008에서는 스페인이 패스 중심의 공격 축구로 우승한 것을 계기로 지금까지 유럽과 세계 축구의 전성시대를 이루었습니다. 공수의 짜임새를 바탕으로 쉴틈없이 패스를 주고 받고 움직이면서 상대 수비의 허점을 노렸습니다.
스페인은 유로 2008에서 비야-토레스 투톱을 완성 시켰습니다. 유로 2012에서는 제로톱을 들고 나왔습니다. 기본적으로 4-3-3 포메이션이지만 경기시에는 공격수가 없는 4-6-0을 활용합니다. 비야가 부상으로 대회에 불참했고 토레스는 소속팀 첼시에서의 부진으로 델 보스케 감독에게 믿음을 얻지 못했습니다. 요렌테-네그레도 같은 백업 공격수들은 메이저 대회 경험이 부족했습니다. 본선 1차전 이탈리아전, 2차전 아일랜드전에서는 파브레가스를 미드필더 윗쪽으로 올리면서 제로톱을 활용했습니다. 이를 가리켜 '가짜 9번(False 9)'이라는 수식어가 만들어졌죠. 3차전 크로아티아전에서는 나바스가 제로톱으로 나섰습니다.
현재까지는 스페인의 제로톱이 성공적입니다. 파브레가스는 이탈리아전과 아일랜드전에서 골을 넣었고 나바스는 결승골을 터뜨렸습니다. 나바스 골장면은 파브레가스 로빙 패스에 이어 이니에스타가 박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찔러준 패스의 공이 컸지만요. 최전방 공격수 영향력에 치우치지 않고 미들라이커가 골을 해결했습니다. 특히 제로톱은 중앙 수비가 강한 팀을 상대로 재미를 봤습니다. 이탈리아전과 크로아티아전 골 과정이 그랬습니다.
다만, 이탈리아전에서는 파브레가스가 골을 넣기 전까지 상대 수비 견제를 이겨내지 못했습니다. 스페인이 점유율에서 앞섰음에도 이탈리아의 3백 변형 작전을 넘기에는 박스 안쪽을 파고드는 공격 패턴의 세밀함이 부족했습니다. 스페인의 허리가 이탈리아 중앙 미드필더 압박에 눌리면서 앞쪽으로 종패스를 밀어주기가 어려웠죠. 파브레가스가 후반 19분에 골을 넣지 못했다면 제로톱은 실패로 끝났을 전술입니다.
그럼에도 스페인이 제로톱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현대 축구에서 타겟맨의 영향력이 약화된 것과 밀접합니다. 최전방에서 골을 노리거나, 강력한 파워와 몸싸움으로 상대 수비와 경합하거나, 공중볼을 따내는 타겟맨의 전형적인 역할이 최근 축구에서는 비중이 떨어졌죠. 올 시즌 첼시의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이끈 드록바의 경우는 예외지만 이제는 공격수도 팀 플레이를 펼쳐야 합니다. 스페인에서는 169cm의 메시가 FC 바르셀로나에서 중앙 공격수를 맡으면서 엄청난 골을 넣었지만 때로는 이타적인 플레이를 펼칩니다. 맨체스터 시티의 프리미어리그 우승을 이끈 아궤로도 원톱으로 뛸때는 패스를 통한 동료 선수와의 공존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스페인 제로톱의 장점은 공격형 미드필더를 4명이나 활용할 수 있습니다. 이니에스타-사비-실바를 측면과 공격형 미드필더에 배치하면서 파브레가스를 윗쪽으로 올립니다. 4명은 플레이메이커 활용이 가능한 선수들이죠. 기본적으로 경기를 운영하는 능력을 갖췄으며, 너른 시야, 정확한 패싱력과 패스의 강약 조절, 부드러운 발재간 같은 공통점을 갖췄습니다. 한마디로 영리하면서 볼을 잘 다루는 스타일이죠. 다른 팀 같으면 창조적으로 경기를 풀어줄 선수가 대략 1~2명 정도 되겠지만 스페인은 경기를 조율할 선수가 최대 4명이 됩니다. 스페인 축구의 대표 키워드인 '패스'의 장점을 최대화 시킨 전술이 바로 제로톱입니다.
하지만 제로톱은 스페인 현 대표팀이 원조가 아닙니다. 이탈리아의 AS로마는 2000년대 중반에 토티를 제로톱으로 활용했으며 FC 바르셀로나도 과르디올라 체제에서 몇차례 제로톱을 구사했습니다. 프리미어리그의 에버턴도 한때는 공격수들이 줄부상에 빠지면서 제로톱을 꺼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한국 축구 대표팀도 2011년 아시안컵에서는 지동원에게 제로톱 임무를 부여했었죠. 그동안 수많은 팀에서 제로톱을 활용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스페인 제로톱은 팀의 원톱이었던 비야의 부상 공백을 전술적인 힘으로 메우겠다는 의도입니다. 제로톱을 '대체 전술'로 바라볼 수도 있죠. 한국 대표팀도 지난해 아시안컵 때는 박주영이 부상으로 빠지면서 지동원이 혼자 최전방 공격을 맡았습니다.
아직까지는 스페인 제로톱을 극찬할 단계까지는 아닌 것 같습니다. 파브레가스가 이탈리아전에서 경기 내용상 고전한 것을 참고해야 합니다. 스페인의 본선 3경기 행보를 놓고 보면 토레스가 원톱으로서 맹활약 펼쳤던 아일랜드전 경기력이 가장 좋았습니다.(그러나 아일랜드는 이탈리아-크로아티아보다 약하지만) 제로톱은 스페인 공격 전술 중에 하나일 뿐입니다. 경기 중에 제로톱이 통하지 않을 때는 토레스를 원톱으로 활용하거나 아니면 요렌테가 투입되었을 겁니다. 그럼에도 제로톱은 원톱, 투톱, 스리톱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진화한 전술'임에 틀림 없습니다. 스페인의 토너먼트 과제는 본선 3경기에서 미완성 단계였던 제로톱을 완성시키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