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팬들이 주말에 밤을 꼬박 새며 유럽 축구에 열광하는 대표적인 이유는 한국인 선수의 경기를 보고 싶어 합니다. '축구의 본고장' 유럽 무대에서 한국 축구의 위상을 빛내는 태극 전사들의 모습을 보며 일상 속에서 받았던 스트레스를 풀고, 삶의 새로운 에너지를 얻으며 주말 밤을 맞이합니다. 불과 몇년 전까지는 빅 리그에서 뛰는 한국인 선수가 없었지만 이제는 국내에서 유럽 축구를 즐길 스토리가 풍성합니다. '지참치' 지동원(20, 선덜랜드)의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 데뷔골 장면이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죠.
[사진=지동원 (C) 선덜랜드 공식 홈페이지(safc.com)]
지동원 데뷔골은 예상치 못했던 일입니다. 선덜랜드의 상대팀은 첼시였고, 지동원은 9월초에 한국-쿠웨이트에서 A매치를 치르면서 정상적인 컨디션을 찾았는지 의문 이었습니다. 니클라스 벤트너가 아스널에서 임대되면서 지동원 입지가 새로운 고비를 맞이했죠. 첼시전 직전에는 아사모아 기안이 아랍에미리트 연합(UAE) 알 아인으로 임대되었지만 벤트너가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이 분명했습니다. 선덜랜드-첼시 경기는 '데뷔전을 기다렸던' 박주영이 후보 명단에 포함된 아스널-스완지 시티전과 동일한 시간에 진행되면서, 국내 축구팬들의 관심은 선덜랜드 보다는 아스널쪽에 관심이 쏠렸습니다.
그런 지동원은 첼시전에서 후반 36분에 교체 투입 했습니다. 팀이 0-2로 지고 있는데다 경기력이 난조에 빠지면서 사실상 패배가 확정된 분위기 였습니다. 그래도 지동원은 프리미어리그 경험이 필요했던 만큼 짧은 출전 시간도 소중했습니다. 그리고 9분 뒤에 자신의 축구 인생에서 역사적인 장면을 연출했습니다. 세바스티안 라르손이 오른쪽 측면에서 박스 쪽으로 크로스를 띄운 볼이 니클라스 벤트너의 오른발을 맞으면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었고, 지동원은 오른발 논스톱 발리 슈팅으로 골을 터뜨렸습니다. 얼마전 A매치 레바논전에서 2골을 넣었던 감각이 살아있는 골 장면 이었습니다.
지동원 데뷔골은 선덜랜드가 첼시전 1-2 패배속에서 건졌던 유일한 소득입니다. 8월 3경기(2무1패)에서 1골에 그쳤던 빈약한 골 감각이 문제였죠. 기안-세세뇽-위컴 같은 공격수들이 저조한 활약을 펼쳤습니다. 첼시전 직전에는 기안이 떠났고 벤트너가 새롭게 가세했지만, 아스널 출신의 공격수도 첼시전에서 이렇다할 활약이 없었습니다. 반면 지동원은 달랐습니다. 부족한 출전 시간 속에서 골을 터뜨리는 임펙트를 과시했습니다. 경기 종료 직전에 골을 터뜨린 것은 첼시에게 일방적으로 끌려다녔던 동료 선수들에게 반성의 계기를 심어주게 됐습니다. 지동원 골만 아니었다면 선덜랜드는 첼시전에서 완벽한 참패를 당했을 것입니다.
선덜랜드는 첼시와의 홈 경기에서 4-2-3-1을 활용했습니다. 시즌 초반 3경기에서는 기안-세세뇽 투톱을 활용했지만 두 선수의 폼이 저조했습니다. 이번 첼시전에서는 세세뇽이 공격형 미드필더로 내려가고 벤트너를 원톱으로 활용하면서 미드필더진 무게 중심을 수비쪽으로 틀었지만 상대의 파상 공세를 이겨내지 못했습니다. 무실점에 주력하는 인상이었지만 지난 시즌의 장기였던 역습 공격이 살아나지 못하면서 수비 부담이 커졌습니다. 전반 18분에는 존 테리에게 선제골을 내주면서 사기가 꺾이고 말았죠.
특히 조단 헨더슨이 리버풀로 이적했던 공백을 어느 누구도 메우지 못했습니다. 미드필더진의 공격 짜임새가 떨어지면서 공격수와의 패스 워크가 쭉쭉 뻗지 못하는 찝찝함에서 벗어나지 못했죠. 지난 시즌 선덜랜드 측면에서 역습을 주도했던 임대생 대니 웰백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복귀한 것도 전력 약화의 또 다른 원인 이었습니다. 지난 시즌 왼쪽 측면을 책임졌던 스티브 말브랑크는 팀을 떠났고, 오른쪽 윙어였던 아메드 엘모하마디는 첼시전 선발 명단에서 제외 됐습니다. 공격수 쪽에서는 세세뇽이 침체에 빠졌고 임대생 벤트너는 아스널에서 골 결정력에 기복이 심했던 선수였습니다. 지금까지는 선덜랜드의 공격력의 지난 시즌보다 약해진 것이 분명합니다.
리그 16위로 추락한 선덜랜드의 공격력 침체는 지동원에게 호재입니다. 지동원의 출전 시간이 앞으로 더 늘어날 것으로 보입니다. 선덜랜드가 이제는 성적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죠. 브루스 감독 입장에서는 지동원이 유망주겠지만 세세뇽보다 못하는 선수는 아닙니다. 경험과 네임벨류에서는 벤트너에게 밀릴지 모르겠지만, 실속에서는 지동원이 벤트너보다 뒤쳐진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첼시전을 놓고 보면 풀타임 뛰었음에도 공격의 실마리를 풀지못한 벤트너 보다는 9분 출전 속에서도 골을 터뜨렸던 지동원이 더 효율적인 공격수 였습니다. 브루스 감독의 결단만 있다면 지동원은 세세뇽-벤트너보다 더 많은 활약을 보여줄지 모릅니다.
지동원의 앞날 맹활약을 예상하는 이유는 공격의 맥을 짚는 능력이 발달되었기 때문입니다. 각급 대표팀에서는 원톱으로 활약한 경우가 많았지만 친정팀 전남에서는 공격형 미드필더-왼쪽 윙어로 더 많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풍부한 활동량과 정확한 패싱력, 수준급 기교를 통해서 헌신적인 플레이를 하는 '팀 플레이어' 입니다. 박스 안쪽 보다는 바깥쪽에서의 움직임이 많죠. 프리미어리그 선수들과 비교하면 파워와 몸싸움이 떨어지는 약점이 있지만 볼을 받을때의 포지셔닝이 발달되면 팀을 위해 더 많은 공격 기회를 창출할 것으로 보입니다. 지동원은 국내에서 효율적인 포지셔닝을 나타냈지만 아직 프리미어리그의 빠른 템포에 적응할 필요가 있습니다. 브루스 감독에게 많은 출전 시간을 얻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이러한 지동원의 장점은 선덜랜드의 단점을 메우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선덜랜드는 공격의 구심점 역할을 해줄 선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공격수들이 최전방에서 갈피를 잡지 못합니다. 관건은 브루스 감독이 지동원의 우수성을 팀 전술에 적극 반영할 것인지 여부 입니다. 단순한 유망주로 생각하기 보다는 이제는 본격적으로 키워야 할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똑같지는 않아도 비슷한 경우지만, 2009/10시즌 볼턴에 진출했던 이청용은 롱볼 축구를 일관했던 팀의 전술적 색깔에 창의성을 키우면서 팀의 에이스로 떠올랐습니다. 게리 멕슨 전 감독에게 기회를 얻은 것이 주효했습니다. 브루스 감독이 볼턴과 이청용의 성공 사례를 인지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물론 프리미어리그 같은 거친 곳에서 한국인 중앙 옵션이 성공했던 사례는 없었습니다. 이동국-김두현-조원희는 잉글랜드 무대의 중앙에서 버티지 못한 끝에 국내 무대로 돌아와야했죠. 박지성-이영표-이청용-설기현 같은 측면 옵션들은 두각을 떨쳤죠.(설기현은 레딩 시절을 말함) 프리미어리그는 중앙쪽에서 다부진 체격과 거친 몸싸움으로 상대 공격수를 제압하는 수비수들이 즐비합니다. 중앙 압박까지 견고하죠. 하지만 축구는 머리의 힘이 중요한 스포츠 입니다. 프리미어리그에서도 힘보다는 기교와 지능이 발달된 선수들이 인정받는 추세이며 지동원은 잠재력이 풍부합니다. 지동원의 첼시전 데뷔골은 코리안 신화의 또 다른 시작을 알리는 멋진 장면 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