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팬으로서 오랜만에 즐겼던 스케줄 이었습니다. 박지성 선발 출전 여부를 파악하기 위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이하 맨유) 현지 포럼 '레드카페'를 드나들었고, 마침내 선발 출격이 이루어지면서 트위터 이웃분들에게 소식을 전했습니다. 맨유 경기를 봤던 저의 두 눈은 박지성에게 초점이 향할 수 밖에 없었죠. 박지성의 모습이 매우 반갑게 느껴졌습니다.
'산소탱크' 박지성이 드디어 복귀했습니다. 박지성은 2일 저녁 8시 45분(이하 현지시간) 런던 업튼 파크에서 진행된 2010/11시즌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 31라운드 웨스트햄 원정에 선발 출전하여 63분 뛰었습니다. 그의 소속팀 맨유는 4-2 역전승을 거두었죠. 전반 11분과 24분 마크 노블에게 두번씩이나 페널티킥 골을 허용하는 불안한 출발을 했지만, 웨인 루니가 후반 21분-27분-33분에 골을 터뜨리면서 해트트릭을 달성했습니다. 후반 38분에는 하비에르 에르난데스가 추가골을 터뜨리며 '맨유 극장'을 완성 지었습니다.
웨스트햄 원정에서 승리한 맨유는 리그 1위(19승9무3패, 승점 66)를 지켰습니다. 2위 아스널(17승8무5패, 승점 59)이 블랙번과의 홈 경기에서 득점없이 비기면서 맨유가 우승에 한 걸음 더 다가섰습니다. 맨유는 오는 7일 새벽 3시 45분 스탬포드 브릿지에서 UEFA 챔피언스리그 8강 1차전 첼시전을 치릅니다. 웨스트햄전에서 좋은 활약을 펼쳤던 박지성의 출격 여부가 벌써부터 궁금해집니다.
[사진=박지성 (C) 맨유 공식 홈페이지 프로필 사진(manutd.com)]
박지성, 기대 이상 활약 펼쳤던 복귀전
맨유는 웨스트햄 원정에서 4-2-3-1로 나섰습니다. 쿠쉬착이 골키퍼, 에브라-비디치-스몰링-파비우가 수비수, 깁슨-캐릭이 더블 볼란치, 긱스-박지성-발렌시아가 2선 미드필더, 루니가 원톱을 맡았습니다. 약팀과의 경기에서는 주로 4-4-2를 활용했지만 웨스트햄전에서는 4선 포메이션을 활용했습니다. 웨스트햄은 4-3-3으로 맞섰습니다. 그린이 골키퍼, 브릿지-업슨-다 코스타-야콥센이 수비수, 히츨스페르거-파커-노블이 미드필더, 뎀바 바-칼튼 콜-오닐이 공격수로 뛰었습니다. 피키온-오빈나 같은 측면 옵션 대신에 중앙쪽에서 활동 가능한 뎀바 바-오닐의 선발 출전은 맨유전을 겨냥한 맞춤형 전술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맨유 수비가 취약하기 때문이죠.
전반전 흐름만을 놓고 보면 맨유의 패배가 유력한 듯 싶었습니다. 에브라와 비디치가 전반 11분과 24분에 페널티킥을 허용하면서 노블이 두 번의 페널티킥을 성공 했습니다. 에브라는 핸드볼 파울, 비디치는 칼튼 콜과 경합하면서 왼팔로 거칠게 막았던 것이 일종의 진로방해가 됐습니다. 맨유가 전반전에 공격을 시도하는 기회가 많았음에도 예상치 못한 실점을 허용하면서 선수들의 사기가 떨어졌습니다. 다시 말해, 맨유에게 운이 따르지 못했던 전반전이었죠. 반면 웨스트햄은 맨유전 이전까지 최근 리그 7경기에서 3승3무1패로 강등권에서 탈출하면서(맨유전 패배로 18위 추락) 선수들의 폼이 올라온 상태였습니다. 2주 휴식 기간이 있었기 때문에 그동안 누적된 피로를 풀었죠.
맨유 선수들의 전반전 몸놀림은 무거웠습니다. 미드필더와 수비수 사이에서 간격이 벌어지면서 웨스트햄 스리톱의 선 굵은 공격을 막아내는데 버거운 움직임을 나타냈습니다. 비디치가 페널티킥 허용 과정에서 왼팔을 잡아당긴 것은 상대 공격수 움직임을 막아내는데 힘겨웠음을 뜻합니다. 그리고 후방에서 빌드업 속도가 늦어지면서 지공에 의존했죠. 문제는 후방이 안정되지 못하면서 공격 옵션들의 포지셔닝이 원활지 않았죠. 2선 미드필더들이 뒷쪽으로 빠지는 움직임이 늘어날 수 밖에 없었고 루니가 상대 수비수들에게 둘러 쌓이면서 공수 밸런스에 불균형이 찾아왔습니다. 웨스트햄 미드필더들의 압박은 견고할 수 밖에 없었고, 맨유의 4-2-3-1 전환은 실패작 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박지성 맹활약은, 역설적으로 박지성의 컨디션이 맨유 선수들 중에서 두드러지게 좋았다는 뜻입니다. 동료 선수들이 최근 A매치에 출전했었고 그동안 피로가 누적되었기 때문에 웨스트햄보다 컨디션이 떨어졌죠. 반면 박지성은 햄스트링 부상이 충분히 회복된 상태에서 경기에 나섰습니다. 한 가지 불안요소가 있다면 실전 감각 이었죠. 지난해 12월 26일 선덜랜드전 이후 아시안컵 참가 및 부상 때문에 맨유 경기에 출전하지 못하면서 동료 선수들과 오랫동안 호흡을 맞추지 못했습니다. 전반 초반에는 동료 선수에게 볼을 받을때의 터치가 부드럽지 않았지만 점차 회복하면서 경기력을 끌어올렸죠.
맨유는 0-2 이후 박지성쪽으로 내주는 패스를 통해 공격의 활로를 찾았습니다. 긱스가 공격의 맥을 찾지 못했고, 캐릭-깁슨은 중원 장악에 어려움을 겪었고, 루니는 최전방에서 고립되면서, 박지성의 움직임이 많아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박지성은 옆쪽, 뒷쪽을 활용하는 낮은 패스들을 섞으면서 웨스트햄 미드필더들의 시선을 다른쪽으로 분산시키는데 주력했죠. 전반 7분-15분-34분에는 앞쪽에 있던 루니에게 정확한 패스를 연결하며 공격의 활로를 열어줬습니다. 전반 18분 루니가 찔러준 오른쪽 크로스를 박스쪽에서 헤딩 슈팅으로 골을 노리는 시도를 했고, 30분에는 박스 정면에서 왼발 슈팅을 날렸던 것이 상대 골키퍼 그린 선방에 막혔습니다. 그럼에도 슈팅 시도는 과감했습니다. 맨유가 전반전에 유일하게 위협적인 장면을 연출했죠.
그런 박지성은 경기 종료 후 <스카이스포츠>로 부터 "좋은 움직임을 나타냈지만 웨스트햄 수비벽에 막혔다"는 평가와 함께 평점 6점을 부여 받았습니다. 맨유 경기를 유심히 못봤던 분들은 스카이스포츠 평가를 그대로 믿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박지성은 웨스트햄에게 봉쇄당한 것이 아니라, 웨스트햄 선수들과 좁은 공간에서 경합했던 시간들이 많았을 뿐입니다. 히츨스페르거-파커-노블로 짜인 웨스트햄 미드필더들이 중앙쪽을 중심으로 활동 반경을 잡았고, 박지성은 공격형 미드필더였기 때문에 상대에게 견제 대상이 되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박지성이 웨스트햄 미드필더들에게 봉쇄당하지 않았던 이유는 상대 수비 밸런스를 흔들면서 그들의 힘을 떨어뜨리는 긍정적 효과를 안겼습니다. 측면 및 중앙 또는 미드필더 깊숙한 곳까지 활발히 움직이고 정확한 패스를 연결하면서(5개의 패스 미스를 범했는데 맨유 미드필더 중에서 가장 적었습니다. 풀타임 출전은 아니었지만요.) 나름대로 자기 몫을 했을 뿐입니다. 전반 22분에는 웨스트햄 미드필더진 사이에서 하퍼가 소유한 볼을 직접 따내며 공격을 전개했고, 그 이후에는 웨스트햄 중원의 정면쪽을 파고드는 움직임을 시도하며 공간을 오밀조밀하게 이용했죠. 다만, 루니가 상대 수비에게 막혔고 맨유가 골을 넣지 못했기 때문에 외부에서 저평가를 받기가 쉬웠습니다.
그랬던 박지성이 후반 18분 교체된 것은 체력 안배 성격이 짙습니다. 웨스트햄전은 부상 이후 복귀전 이었고 그 다음 경기가 첼시전이었기 때문에 풀타임 출전은 무리였습니다. 박지성이 교체되면서 맨유가 4골을 몰아치며 역전승을 일궜지만, 박지성 교체가 맨유 역전승의 발판이 되었던 것은 아닙니다. 박지성의 교체 대상이었던 베르바토프는 이렇다할 활약이 없었습니다. 후반 시작과 함께 에브라를 빼고 에르난데스를 교체 투입했던(그 이후 맨유는 4-4-2 전환, 긱스는 왼쪽 풀백 변신) 퍼거슨 감독의 용병술, 루니의 후반 21분 오른발 프리킥 추격골, 첫 실점에 의해 페이스가 갑자기 떨어진 웨스트햄 선수들의 위기 대처 부족이 서로 맞물리며 4-2 역전승이 연출됐습니다.
박지성이 맨유 4-2 역전승의 직접적인 활약을 펼쳤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웨스트햄 허리 밸런스를 무너뜨리는데 일조한 것은 맨유가 후반 중반부터 루니 프리킥 골에 의해 '승리 본능'이 깨어나면서 경기를 뒤집었죠. 그 결과 루니는 후반 28분 발렌시아가 오른쪽에서 왼발로 낮게 크로스를 띄운 것을 박스 정면에서 오른발 슈팅으로 동점골을 터뜨렸고, 후반 33분에는 페널티킥 골로 해트트릭을 완성했습니다. 후반 38분에는 긱스의 왼쪽 논스톱 패스가 에르난데스의 오른발 밀어넣기 골로 4-2가 됐습니다. 그래도 박지성은 오랜만에 경기에 출전했기 때문에 인상 깊은 복귀전을 펼쳤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박지성의 산소탱크 저력은 여전했고 그 내공에 깊이가 느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