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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김정우, 조광래호 만능맨으로 진화하다

 

2003년 초 올림픽 대표팀에서 있었던 일 입니다. 당시의 올림픽 대표팀은 김호곤 감독 체제에 돌입했지만 마땅한 스위퍼 자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명의 선수를 물색한 끝에 이상철 수석코치가 김정우에게 스위퍼 전환을 제의했습니다. 김정우는 단번에 거절했지만 이상철 수석코치에게 "수비 센스가 뛰어나다"는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 이후 김정우는 3-4-3의 중앙 미드필더 자리를 고수했지만, 멀티 플레이어 기질이 예전부터 잠재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올해 초, 이수철 상주 감독은 K리그 개막을 얼마 앞두고 "김정우를 원톱으로 기용하겠다"고 발언했습니다. 우리들에게 수비형 미드필더, 살림꾼 같은 수비쪽에서의 궂은 역할에 익숙했던 김정우의 최전방 배치는 매우 파격적이고 모험적인 일 입니다. 여론에서는 '김정우가 원톱에 잘 적응할까?'라는 의구심을 가졌죠. 그런데 김정우는 올 시즌 K리그 3경기에서 4골을 넣으며 상주의 K리그 1위 도약을 이끌었습니다. 시즌 초반임을 감안해도 김정우의 4골은 신선한 느낌을 안겨줬습니다. 그동안 조용했던 득점포의 화려한 서막을 열으며 상주의 돌풍 및 K리그 판도까지 뒤흔들게 됐습니다.

그렇다고 김정우가 K리그 3경기에서 모두 원톱으로 뛰었던 것은 아닙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장남석이 상주의 4-2-3-1에서 원톱을 맡고 있으며 김정우가 3의 자리에서 공격형 미드필더로 뛰고 있습니다. 이수철 감독이 김정우를 원톱으로 배치하겠다는 전략이 상대팀들에게 공략당할 수 있는 불안함이 내포되면서 장남석을 최전방에 세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김정우의 실질적 역할은 쉐도우 입니다. 장남석이 상대 수비수들과 경합하면서 포스트 플레이를 펼치는 역할이라면 김정우가 상대 배후 공간을 파고들며 골을 노리고 있습니다. 3경기 4골의 활약상을 봐도 공격수나 다름이 없죠.

공격수로서 가능성을 봤던 김정우의 재능은 조광래호에서도 통했습니다. 지난 25일 온두라스전에서 전반 43분에 골을 넣으며 한국의 4-0 대승에 힘을 실어줬죠. 박스 중앙에서 기성용의 오른쪽 크로스에 이은 박주영의 백패스를 받으며 오른발로 밀어넣는 슈팅을 날리면서 상대 골망을 흔들었습니다. 대표팀에서는 이용래와 함께 4-1-4-1의 공격형 미드필더를 맡았지만, 종방향으로 활동 반경을 넓히면서 박스쪽까지 움직였던 공격 패턴이 골을 터뜨리는 발판이 됐습니다. 상주에서 3경기 4골을 기록하며 상대 골망을 흔들었던 면모가 온두라스전 골의 자신감으로 이어지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특히 조광래호 4-1-4-1의 공격형 미드필더는 다양한 역할을 소화해야 합니다. 수비형 미드필더 및 윙어와의 유기적 공존을 통해 점유율을 늘리거나 연계 플레이를 홥발히 펼칠 수 있는 밑거름 역할을 하며, 원톱의 고립을 풀기 위해 박스쪽까지 움직여야 합니다. 수비시에는 포어체킹을 하거나 중원 지역까지 내려가 압박을 펼치면서 왕성한 활동량이 요구됩니다. 그 과정에서는 빠르고 세밀한 패스 플레이를 주도하면서, 상대 수비 배후 공간을 비집으면서 패스를 받아내는 능동적인 움직임을 펼쳐야 합니다. 김정우-이용래 장점을 키우는 최적의 포지션 입니다.

선수 개인의 장점을 놓고 보면, 김정우는 수비형 미드필더에 어울렸습니다. 김정우가 홀딩 역할을 하면서 기성용-이용래가 공격형 미드필더 역할을 소화할 수 있죠. 하지만 조광래 감독은 김정우에게 공격형 미드필더 역할을 맡겼습니다. 상주에서 공격 지향적인 플레이를 펼치는 원인도 있지만, 득점 감각에서는 기성용-이용래 보다는 김정우가 더 나았습니다. 또한 박주영은 온두라스전 이전까지 1년 6개월 동안 필드골이 없었죠. 박주영이 상대 수비수들과 적극적으로 맞서면서 그들의 시선을 자신쪽으로 유도하고, 김정우가 박스쪽으로 침투하여 골을 노리는 패턴이 가능했습니다. 그 작전은 전반 43분에 적중했습니다.

만약 김정우가 철저한 홀딩맨 이었다면 지금의 조광래호에서 공격형 미드필더에 성공적으로 적응했을지 의문입니다. 물론 김정우는 그 이전에도 공격형 미드필더를 소화한 경험이 있습니다. 나고야 그램퍼스 및 성남, 그리고 베어벡호에서 공격형 미드필더를 맡았죠. 하지만 그때는 패스를 내주는 플레이에 집중했습니다. 날카로운 스루패스 및 종패스를 기반으로 동료 공격수의 골을 지원하는 역할에 충실했습니다. 그런데 상주 및 조광래호에서는 득점력이 장착된 공격형 미드필더로 진화했습니다. 단순히 패스를 내주는 것 뿐만 아니라 팀의 득점 과정까지 의욕적으로 참여합니다. 그동안 숨겨졌던 득점 본능이 드디어 되살아났죠.

결국, 김정우는 조광래호의 '만능맨'으로 진화 했습니다. 공격이면 공격, 수비면 수비 뿐만 아니라 골까지 해결하게 됐습니다. 축구팬들에게 '뼈'라고 불릴 정도로 체격 조건에서 아쉬움이 있지만, 그 약점을 투철한 움직임 및 승부근성으로 커버하면서 다양한 역할을 소화할 수 있는 장점을 얻었습니다. 남아공 월드컵때는 상대 공격을 차단하는 임무에 온 힘을 쏟으면서 홀딩맨으로 각광받았다면, 지금의 조광래호에서는 4-1-4-1에서 요구되는 공격형 미드필더 역할에 충실하며 자신의 활용도를 높였습니다. 또한 옆쪽에서는 이용래가 부지런히 움직이면서 기동력 부담을 덜었습니다. 그러면서 조광래호는 상대 압박 속도보다 더 빠른 공격 플레이를 전개하는 이점을 얻었죠.

그런 김정우는 지금부터가 중요합니다. K리그 3경기 4골 및 온두라스전 맹활약이 한낯 반짝이 되지 않도록 꾸준함을 길러야 할 것입니다. 물론 언젠가는 고비에 빠질지 모릅니다. 아무리 골을 잘 넣는 공격수라도 거의 매 경기마다 상대 골망을 흔들수는 없는 일입니다. 어떤때는 골 운이 따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김정우는 아직 그 경험이 익숙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김정우는 그 고비를 충분히 이겨낼 것입니다. 팀 플레이가 몸에 베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골을 해결짓지 못하면 다른 동료 선수들을 도와주면서 골을 터뜨리는 분위기를 주도할 수 있습니다. 과거에 공격형 미드필더를 소화했던 패턴과 동일하죠. 만능맨으로서 여러가지 노하우를 습득했던 경험 또한 도움이 될 것입니다. 기본적인 축구 센스가 뛰어난 선수로서 경기 상황에 따라 어떤 역할을 도맡거나 움직일지 잘 알고 있죠. 8년 전 올림픽 대표팀에서 이상철 수석코치에게 스위퍼를 제안받았던 그의 만능적인 축구 본능이 드디어 만개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