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래호 출범 이후, 비범한 재능에도 불구하고 크게 쓰임새를 받지 못했던 선수들이 여럿 있습니다. 조광래 감독이 자신의 축구 철학과 맞지 않는 이유로 제외시켰던 이동국, 허정무호 주전 수비수였던 조용형, 지난해 K리그 득점왕 유병수, K리그에서 준수한 활약을 펼쳤으나 대표팀과 인연없는 김영후, '치우천왕' 김치우, 남아공 월드컵 히어로 김정우 등을 거론할 수 있죠. 이들은 각기 다른 이유로 조광래 감독의 지속적인 선택을 받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김정우(29, 상주 상무)는 다르다는 생각입니다. 비록 무릎 부상 때문에 아시안컵-터키전 엔트리에 포함되지 못했지만, 조광래호에 필요한 홀딩맨인 것은 분명합니다. 지난해 9월 7일 이란전에서 기초 훈련에 따른 컨디션 저하로 출전 시간이 짧았던 아쉬움이 있었지만 2개월 뒤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말끔히 회복했습니다. 다가오는 3월 A매치 2경기(콜롬비아, 몬테네그로전)에서 김정우가 붉은색 유니폼을 입는 모습을 볼 수 있을지 주목됩니다.
기성용-이용래 조합을 통해 본 김정우의 필요성
조광래호가 아시안컵-터키전을 통해 기성용-이용래로 짜인 더블 볼란치를 완성한 것은 분명합니다. 두 선수가 줄곧 대표팀 중원을 지켰기 때문입니다. 서로 발을 맞췄던 초반에는 풀백과의 커버링이 한 박자 늦어지는 단점이 있었지만 점차 호흡이 단련되면서 상대에게 뒷 공간을 내주지 않게 됐죠. 기성용이 셀틱에서 업그레이드 된 몸싸움 및 과감한 태클로 상대 공격을 차단하는데 주력했다면 이용래는 특유의 왕성한 활동량으로 기성용의 움직임 부담을 덜어줍니다. 서로의 다른 컨셉이 공존하면서 터키전에서도 나란히 선발 출전 할 수 있었죠.
하지만 일본-터키전 경기 내용을 미루어보면, 기성용-이용래 조합에게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상대와의 허리 싸움에서 밀렸기 때문입니다. 공교롭게도 두 경기에서는 전반전 또는 후반 초반까지 중원 장악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일본전에서는 홍정호의 포어 리베로 전환, 터키전에서는 박주영 원톱 변신 및 엠레 퇴장이 발단이었죠. 그러면서 기성용-이용래의 폼이 회복됐죠. 두 선수가 직접적으로 경기 분위기를 회복했기 보다는 팀의 전술적인 선택이나 상대팀의 자멸이 영향을 끼쳤습니다. 일본-터키의 레벨을 감안하면, 기성용-이용래 조합은 대표팀에서 믿고 맡기기에는 중요한 경기에서 '임펙트'가 떨어짐을 알 수 있습니다.
기성용-이용래 조합의 수비력은 나쁘지 않습니다. 상대 중앙 미드필더를 꽁꽁 따라 붙거나 중앙 공격 길목을 차단하면서 공간을 내주지 않는데 주력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허리 싸움에서 강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를 얼마만큼 괴롭히느냐 입니다. 때로는 수비에 무게감을 두면서 어떤 경우에는 정교한 패싱력으로 상대 중원 뒷 공간을 흔드는 면모가 필요합니다. 기성용의 바레인전-호주전 패싱력이 좋은 예 입니다. 다만, 호주는 일본-터키의 압박에 비해 힘으로 맞서는 플레이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기성용의 기교가 통할 수 있었죠.
일본-터키전 뿐만 아닙니다. 지난해 9월 7일 이란전에서 0-1로 패했던 원인 중에 하나는 기성용-윤빛가람 조합이 상대의 강력한 압박에 눌리면서 공격쪽에서 페이스를 키우는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조광래호는 패스 위주의 전술로 점유율을 늘리고 공격 패턴의 다양함을 추구하는 컨셉이 뚜렷합니다. 하지만 상대 압박에 밀리면 공격쪽에서 힘을 쓰지 못하며 그 흐름은 지금도 마찬가지 입니다. 지난 아시안컵 이란전 같은 경우에는 기성용이 전반전에 포어 리베로로 전환하면서 상대의 포어 체킹을 분산시키면서 기선 제압을 했고, 이용래가 왼쪽 전방으로 빠지는 움직임이 늘어나면서 이란의 무게 중심을 후방쪽으로 가둬놓는데 성공 했습니다.
아쉬운 것은 체력 저하에 발목 잡히면서 일본전 경기 운영이 어려웠습니다. 그렇다고 체력 저하를 탓할 수는 없습니다. 터키전 개최 시점이 무리했다는 일부의 견해도 있지만, 앞으로 대표팀 선수들이 최상의 컨디션 속에서 A매치에 임할지는 알 수 없습니다. 소속팀과 대표팀 일정을 병행하기 때문에(기성용은 스코틀랜드와 국내를 왕복해야 하는) 때로는 체력 및 컨디션이 떨어진 상태에서 경기에 임하거나 선발에서 제외될 수 있습니다. 중원 장악 실패의 원인으로 체력이 변명되어서는 안됩니다. 다른 나라 선수들도 엄청난 경기 일정을 소화합니다.
결국에는 조광래호가 기성용 공격력을 키워야 합니다. 기성용의 주특기인 패싱력 및 공격 조율이 90분 동안 쉴새없이 상대 허리를 공략하고 팀 공격의 근간이 될 수 있도록 말입니다. 대표팀은 한정된 차출 시간 속에서 선수 개인의 기량을 팀 전술에서 조화를 이루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기성용의 장점을 팀 전술에 적극 반영해야 합니다. 허정무호 시절부터 대표팀 중앙 공격의 골격으로 육성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용래는 기성용과의 호흡이 잘 맞지만, 기성용을 편안하게 할 선수는 김정우라는 답안이 나옵니다. 기성용의 수비 부담을 줄여주면서 공격적인 재능을 키울 수 있는 원동력은 김정우의 홀딩 능력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기성용-김정우 조합의 가치는 두말 할 필요 없습니다. 남아공 월드컵 16강 진출 만으로 다른 어떤 조합보다 아우라가 강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김정우는 국제축구연맹(FIFA)가 지난해 7월 중순에 발표했던 남아공 월드컵 선수 랭킹에서 85위(8.38점/10점 만점)를 기록하여 한국 선수 중에서 가장 높은 순위에 올랐습니다. 그동안 조광래호에서 부상 및 컨디션 저하로 크게 중용받지 못했던 아쉬움이 있지만, 조광래 감독과 궁합이 안맞은 선수는 아닙니다. 김정우가 중원에서 찔러주는 스루패스 만큼은 최근 몇년 동안 한국에서 톱클래스 였습니다. 특유의 헌신적인 수비력으로 기성용의 공격력을 키워주면서, 때로는 기성용과 다른 헝태의 볼 배급으로 허정무호의 중원을 화려하게 빛냈습니다.
조광래 감독은 스페인식 축구를 선호합니다. 하지만 스페인이 유로 2008, 남아공 월드컵을 석권할 수 있었던 원동력 중에 하나는 수비적인 재능이 뛰어난 미드필더가 있었다는 점입니다. 유로 2008에서는 세나, 남아공 월드컵에서는 부스케츠-알론소 조합이 있었습니다. 부스케츠-알론소 조합의 경기 운영 면에서는 홀딩맨 역할과 거리감이 있었지만 적극적인 수비 가담 및 공수 밸런스 조절로 상대 중앙 공격을 분쇄했습니다. 물론 홀딩맨이 없는 축구는 매력적이지만, 한국 축구가 아직 세계적인 수준의 레벨이 아님을 감안하면 그 특성에 맞는 '스페셜 리스트'가 절실합니다. 결론은 김정우가 조광래호에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