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시즌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는 강팀과 약팀의 레벨 격차가 적어진 평준화의 행보가 뚜렷합니다. 약팀이 강팀 및 다크호스의 발목을 잡는데다, 웨스트 브로미치-뉴캐슬-블랙풀 같은 승격팀들의 오름세가 두드러지는 요즘이죠. 물론 평준화는 강팀들에게 반갑지 않습니다. 빅8 범주에 포함되는 맨유-아스날-토트넘-애스턴 빌라-에버턴-리버풀의 전력은 지난 시즌보다 떨어지거나 정체된 모습을 보였습니다. 특히 리버풀은 리그 평준화의 '최대 피해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리버풀의 리그 7경기 성적은 1승3무3패(승점 6)이며 7골 11실점을 기록했습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지난 4일 '승격팀' 블랙풀과의 홈 경기에서 1-2로 패하면서 리그 18위로 추락했고 우승 경쟁은 커녕 강등권 위협에 시달리게 됐습니다. 리그 4위 아스날(3승2무2패, 승점 11)과 승점 5점 차이기 때문에 빅4 재진입 가능성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두 라운드 연속 16위에 머무르다 블랙풀전 패배로 18위까지 떨어진 것은 강팀답지 못한 행보입니다. 2008/09시즌 맨유와 시즌 막판까지 치열한 우승 경합을 벌였던 과거를 돌이켜보면 격세지감이라는 말이 실감납니다.
호지슨 감독, '위기의' 리버풀을 벼랑 끝으로 몰았다
리버풀의 현재 모습을 하나의 사자성어로 요약하면 '이판사판' 입니다. 지난 시즌 7위로 추락했고 올 시즌 리그 18위 부진에 빠졌지만 기존 스쿼드에서 마땅한 돌파구가 없는 것이 지금의 현 주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잉글랜드의 대표적인 명문 구단으로서 위상을 확립하기에는 마지막 궁지에 몰린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팀의 외부 상황은 더욱 절망적입니다. '미국인 공동 구단주' 힉스-질레트가 거대한 빚을 떠안으면서 오는 15일까지 그 돈을 갚지 못하면 스코틀랜드 왕립 은행(RBS)에 의해 법정 관리에 들어갑니다. 부채 상환 종료 시점이 6일에서 15일로 연기된 것이 위안이지만, 문제는 리버풀의 매각 작업이 별 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재정 문제는 둘째 치더라도, 명예회복 기미 조차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리버풀에게 절망적입니다. 일각에서는 리버풀의 시즌 초반 부진 원인을 강팀과의 대결 및 부담스런 버밍엄 시티 원정 때문이라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홈 구장 안필드에서 치러졌던 지난달 25일 선덜랜드전 2-2 무승부, 지난 4일 블랙풀전 1-2 패배를 당하면서 이 같은 주장은 설득력을 잃었습니다. 이제는 홈 구장에서 약팀에게 비기거나 패하는 실망스런 모습을 홈팬들에게 보여주는 수치스런 행보를 걷고 있습니다. 다음 경기가 '머지사이드 더비' 에버턴 원정이라는 점은 리버풀에게 부담입니다.
국내 K리그에 비유하면, 리버풀의 현재 모습은 몇 개월전의 수원과 흡사합니다. 수원은 2008년 K리그 우승을 차지했던 대표적인 강호였지만 지난해 10위로 추락했고 올해 남아공 월드컵 이전까지 꼴찌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습니다. 리버풀과 수원은 불과 1~2년 전까지 리그 우승권에 있었고, 현재보다는 과거의 커리어 및 경기력이 더 우수하고 훌륭했습니다. 그리고 열광적인 서포터들의 지지를 받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어쩌면 리버풀의 위기 탈출 해법은 수원에서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감독 교체' 입니다. 수원은 차범근 전 감독이 성적 부진을 책임지고 사의를 표명하면서 윤성효 감독을 영입했습니다. 윤성효 감독은 차범근 체제에서 정체되었던 패스게임의 활용도를 높이며 전임 감독의 문제점이었던 롱볼 축구를 버렸습니다. 그 결과 염기훈-김두현-이상호-백지훈 같은 테크니션들이 두각을 떨치면서 수원의 재건을 이끌었습니다. 비록 지난달에는 잦은 경기 일정에 따른 체력 저하로 7~8월의 기분좋은 흐름을 이어가지 못했지만, 경기력 퀄리티에서는 부활의 윤곽을 그리는 긍정적 성과를 얻었습니다.
수원의 사례를 놓고 보면, 축구는 감독의 비중이 높은 스포츠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프리미어리그로 화제를 돌리면, 첼시는 스콜라리 체제에서 끝없는 추락에 시달렸으나 히딩크 감독 영입으로 강팀의 위용을 되찾았고 지금의 안첼로티 체제에서 눈부신 성과를 달성했습니다. 이청용 때문에 익숙해진 볼턴의 대표 키워드는 '엘라다이스-멕슨 전 감독이 주도했던' 롱볼 축구였지만, 지난 1월 코일 감독을 영입하면서 패스 게임 정착에 힘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리버풀은 지난 시즌 리그 7위의 악몽을 이겨내기 위해 호지슨 감독을 영입했지만, 문제는 두 존재 사이의 컨셉이 전혀 궁합이 맞지 않습니다.
호지슨 감독이 명장 반열에 있는 지도자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의 축구 철학은 변혁적인 이미지와 대조되는 구시대 스타일입니다. 경기를 다채롭게 풀어가는 패스 게임에서 비롯된 과감한 전략보다는 탄탄한 수비를 강점에 두는 선 굵은 플레이를 강조하며 롱볼 패턴의 공격을 즐깁니다. 최근 리버풀의 공격 패턴을 보더라도 롱볼의 빈도가 점점 높아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이 리버풀의 색깔과 맞지 않습니다. 리버풀 선수들은 전임 감독인 베니테즈 체제에서 패스 게임에 길들여졌고, 두 시즌 전에는 '골 넣는 공격축구'를 앞세워 리그에서 가장 많은 골을 넣기도 했습니다. 그런 팀이 롱볼 축구로 전환한 것은 공격 패턴의 퇴보를 의미합니다.
물론 리버풀의 패스 게임 축소는 스쿼드에서 비롯된 어쩔 수 없는 결과로 볼 수 있습니다. 막시-조 콜-폴센-메이렐레스-요바노비치는 최근 1년 이내에 리버풀로 이적했던 미드필더들입니다. 문제는 5명 모두 호지슨 체제의 리버풀에서 확실한 인상을 심어주지 못했습니다. 그나마 메이렐레스가 다른 4명보다 열의를 다하고 있지만 호지슨 감독의 잘못된 선수 기용에 의해 경기력이 최대화 되지 못하는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전형적인 박스 투 박스 성향의 미드필더지만 지난 맨유전에서 4-2-3-1의 공격형 미드필더, 선덜랜드전에서는 4-4-2의 오른쪽 윙어로 뛰어야만 했습니다. 특히 선덜랜드전 측면 전환은 리버풀이 1-2로 패배하는 요인 중에 하나였습니다. 공교롭게도 두 경기는 메이렐레스의 포지션 전환이 리버풀의 연계 플레이가 살아나지 못하는 근본적 원인이 됐습니다.
호지슨 감독의 패착은 그뿐만이 아닙니다. 선수의 장점을 팀의 전술 강화에 적극 이용하지 못하는 대표적인 사례는 제라드이기 때문이죠. 제라드는 수비형 미드필더 혹은 중앙 미드필더로 뛰고 있지만, 리버풀에는 제라드 이외에도 그 자리에 뛸 수 있는 선수들이 여럿 있습니다. 폴센-루카스-메이렐레스가 그들입니다. 폴센-루카스의 실력이 어엿한 주전급 레벨과 거리감이 있다는 점이 리버풀의 불안 요소지만, 개인이 안되면 조합의 힘으로 중원 불안을 해결해야 하는 것이 호지슨 감독의 과제였습니다. 하지만 호지슨 감독은 제라드를 후방으로 내리면서 팀의 공격을 지휘할 수 있는 구심점을 잃었습니다. 리버풀에는 제라드 만큼 공격형 미드필더를 훌륭히 소화할 선수가 없습니다.(조 콜은 지난 시즌 첼시에서 실패작)
어찌보면, 호지슨 감독의 과오는 단순한 시행착오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리버풀이라는 명문 클럽의 수장을 맡은지 얼마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지도자로서의 경험이 풍부하고 그동안 여러 클럽에서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던 명장이기 때문에 '지난 시즌 7위였던' 리버풀의 위기를 끝낼 수 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호지슨 감독은 리버풀을 리그 18위 강등권의 벼랑 끝으로 몰아넣고 말았습니다. 시즌 초반이라고 위안을 삼기에는 스타트가 매우 좋지 않습니다. 만약 리버풀의 행보가 이대로 지속된다면, 감독 교체를 검토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