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비오 카펠로 감독이 이끄는 잉글랜드 축구 대표팀이 슬로베니아를 1-0으로 제압하면서 천신만고 끝에 16강에 진출했습니다. 잉글랜드는 슬로베니아전 이전까지 두 번의 무승부를 기록하면서 한때 본선 탈락 위기에 몰렸습니다. 슬로베니아전에서는 전반 21분 제임스 밀너의 크로스에 이은 저메인 디포의 결승골을 앞세워 충격의 탈락을 모면했습니다.
하지만 잉글랜드가 16강 진출 속에서도 웃을 수 없는 이유는 에이스 루니의 부진이 깊어졌기 때문입니다. 루니는 후반 12분 슬로베니아 골키퍼 한다노비치와의 1대1 상황에서 날렸던 슈팅이 크로스바를 맞고 나오는 불운에 시달린 것을 비롯 상대 수비를 위협하는 움직임이 부족했습니다. 오히려 공을 잡으면 슈팅을 날리기 위해 무리한 돌파를 펼쳐 상대 압박에 걸리거나 연계 플레이가 끊어지는 문제점이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루니는 이 날도 무득점 침묵을 지키며 골잡이로서의 저력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문제는 잉글랜드가 루니의 부진 뿐만 아니라 발목 부상까지 걱정하게 됐습니다. 루니가 후반 27분 교체 된 것은 부진에 따른 질책성 교체가 아닌 발목 부상에 따른 불가피한 교체였던 것입니다. 지난 3월 말 UEFA 챔피언스리그 8강 1차전 바이에른 뮌헨 원정 경기 도중에 발목을 다쳤던 것이 월드컵 무대에서 재발되면서 앞으로의 출전 여부를 장담할 수 없게 됐습니다. 어쩌면 '라이벌' 독일과의 16강전에서는 루니의 부상 공백을 안고 경기를 치러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 놓이게 됐습니다.
이러한 루니의 부상 악몽은 3년 전 유로 2008 예선 탈락의 악몽이 오버랩 됩니다. 잉글랜드는 지난 2007년 11월 21일 크로아티아와의 유로 2008 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2-3으로 패하여 본선 진출에 실패했고 스티브 맥클라렌 감독을 경질했습니다. 당시 루니의 부상 공백을 메우기 위해 피터 크라우치를 원톱에 배치하고 조 콜과 숀 라이트-필립스에게 측면 공격을 맡겼지만 크로아티아의 공세를 막기에는 역부족 이었습니다. 벤치에서 어두운 표정으로 동료 선수들의 활약을 지켜 봤던 루니의 모습을 독일과의 월드컵 16강전에서 또 보게 될지 모를 일입니다.
만약 루니가 독일전에 결장하면 잉글랜드는 골을 해결지을 수 있는 골잡이 없이 경기를 치러야 하는 악조건에 놓입니다. 크라우치-헤스키-디포 같은 프리미어리그의 정상급 공격수들을 보유했지만 문제는 이들이 잉글랜드 대표팀에서 꾸준한 파괴력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그나마 디포가 올 시즌 토트넘의 빅4 진입을 이끌었고 슬로베니아전에서 결승골을 넣은 오름세를 타고 있지만 루니에 비해 무게감이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크라우치-헤스키는 포스트플레이에 강점을 나타내는 성향일 뿐 골잡이와 거리감이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루니의 독일전 결장은 잉글랜드 공격력에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토트넘의 투톱을 맡는 디포-크라우치를 독일 격파의 히든 카드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잉글랜드 대표팀 뿐만 아니라 토트넘을 통해 발을 많이 맞춰봤기 때문에 조합의 힘에 기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디포에게 있어 크라우치의 존재감은 무조건적으로 반가운 것이 아닙니다. 두 선수 모두 2선의 패스를 받아 공격을 따내는 스타일인데, 공을 받아내는 위치가 겹치는 문제점이 토트넘에서 두드러졌고 둘 중에 한 명이 최전방에서 고립되는 비효율적인 공격 형태를 나타내기도 했습니다.
현실적으로 루니의 공백은 디포가 메워야 합니다. 크라우치-헤스키는 골잡이가 아니기 때문에 올 시즌 토트넘에서 물 오른 득점력을 과시했던 디포의 어깨가 무거울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디포의 컨셉은 한마디로 애매모호 합니다. 골잡이와 조율 역할을 동시에 소화할 수 있지만 경기력의 기복이 뚜렷한 선수이기 때문에 어느 위치 및 역할에서든 안정감이 2% 부족한데다 횡적인 움직임이 취약합니다. 또한 미드필더진의 활발한 공격 지원이 뒷받침 될 때 결정적인 골 기회를 엮는 특징이 있습니다. 역으로 말하면 공격을 스스로 해결하는 능력이 떨어집니다.
그래서 잉글랜드는 루니가 독일전에 출전하기를 바랄 수 밖에 없습니다. 루니의 발목이 좋지 않기 때문에 독일전에서 풀타임 출전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지만 단 몇 분이라도 소화할 수 있다면 공격력이 힘을 얻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월드컵 본선 이전까지 루니의 천부적인 공격력 및 특출난 골 생산에 힘입어 공격력에서 많은 재미를 봤기 때문에 루니에 의지하고 싶을 것입니다. 만약 '철천지 원수' 독일에게 패하고 16강에서 탈락하면 축구 종가로서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기 때문에 루니의 필요성이 각인 될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루니가 골 침묵에 빠지고 부상까지 당한 상태에서는 독일전 맹활약을 장담할 수 없습니다. 독일은 탄탄한 수비 조직력을 기반으로 삼는 팀이기 때문에 루니가 고전할 가능성이 큽니다. 미국-알제리-슬로베니아를 상대로 침묵에 빠진 루니라면 독일전 맹활약에 믿음이 실리지 않습니다. 잉글랜드와 독일의 월드컵 본선 3경기 행보를 놓고 보면 메수트 외칠의 창의적인 기교와 플레이메이킹을 앞세워 공격력 업그레이드에 성공한 독일의 승리에 무게감이 실립니다.
만약 잉글랜드가 독일을 제압하고 8강에 진출하더라도 월드컵 우승의 꿈을 이룰지는 의문입니다. 8강에서는 아르헨티나-멕시코 승자와 맞붙는데 현실적으로 '또 다른 라이벌' 아르헨티나와 치열한 혈전을 벌여야 하는 부담감을 안게 됩니다. 루니의 부진 및 부상, 독일과의 부담스런 16강 일정에 8강에서 엄청난 고비를 넘어야 하는 잉글랜드의 월드컵 우승 행보가 순탄치 않은 이유입니다. 루니의 부진이 계속되거나 발목 부상이 회복되지 않으면 월드컵 우승이 어려워질 가능성이 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