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쉬운 패배 였습니다. 본선 첫 경기 그리스전 2-0 완승으로 16강 진출이 현실이 되는 듯 했으나 아르헨티나전에서 상대의 막강한 공격력을 이겨내지 못하고 1-4로 대패했습니다. 다행히 그리스가 나이지리아를 2-1로 제압하면서 16강 진출의 희망이 되살아났지만, 아르헨티나전 패배는 한국의 준비 부족에서 드러난 것이기 때문에 아쉬움이 컸습니다. 오는 23일 나이지리아전에서 이겼으면 하는 마음으로, 아르헨티나전 패배 원인 10가지를 거론하며 나이지리아전 승리의 발판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1. 실력차가 분명 존재했다.
한국과 아르헨티나는 개인 기량을 놓고 봐도 실력차가 분명 존재했습니다. 올 시즌 유럽 축구에서 경이적인 골 생산을 벌이며 인터 밀란의 트레블을 이끈 밀리토가 아르헨티나 대표팀에서 벤치를 지킬 정도로 아르헨티나의 선수층은 두꺼웠습니다. 그래서 퍼스트 터치와 발재간, 패싱력, 압박의 세기, 공간 싸움, 그리고 결정력에서 아르헨티나에 불리할 수 밖에 없습니다. 약팀이 강팀을 상대로 재미를 보려면 수비를 견고하게 구축하면서 역습 기회를 노렸어야했는데 경기 초반부터 오른쪽 측면 뒷 공간에서 침투 공간을 열어주면서 패하고 말았습니다.
2. 차라리 차두리-김남일이 선발 출전했다면?
한국 수비의 가장 큰 문제는 오른쪽에 있었습니다. 경기 초반부터 테베스-메시에게 침투 공간을 열어주면서 뒷 공간이 금새 허물어지는 문제점이 나타났습니다. 메시가 중앙이 아닌 한국의 오른쪽에서 공격의 돌파구를 마련한 것은 아르헨티나가 한국의 공략 지점으로 오른쪽을 택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상대팀의 공격 의중을 알아채지 못한 오범석-기성용의 협력 방어선은 경기 초반부터 무너졌습니다. 기성용의 수비력 부족은 셀틱에서 나타났던 문제점이고 오범석은 자신보다 순발력이 빠른 테베스를 봉쇄하는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오범석-기성용 자리에 차두리-김남일이 선발 출전했다면 경기 양상이 달랐을지 모를 일입니다.
3. 차두리의 선발 제외가 부른 오른쪽 초토화
김남일은 한국의 철저한 백업 멤버지만 차두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한국의 오른쪽 풀백은 차두리와 오범석이 로테이션 형태로 선발 출전을 번갈아갔습니다. 차두리가 힘이 강한 팀, 오범석은 기술이 뛰어난 팀을 상대로 선발 출전했습니다. 그런데 아르헨티나의 왼쪽 윙어는 테베스입니다. 테베스는 메시-막시 같은 전형적인 테크니션 성향과 달리 저돌적인 스피드와 상체가 발달된 육체 능력을 기반으로 상대와의 몸싸움에서 우세를 점하는 스타일입니다. 맨유-맨시티에서 원톱까지 충실하게 소화했던 선수였기 때문에 그를 제압하려면 힘에서 기선 제압할 수 있는 선수가 필요했습니다. 차두리의 선발 제외가 아르헨티나 공격의 빌미를 제공하면서 오른쪽이 초토화 됐습니다.
4. 박주영 자책골
물론 박주영의 자책골은 불운 이었습니다. 전반 15분 데미첼리스의 헤딩슛이 박주영의 발을 맞고 골문으로 향하고 말았기 때문이죠. 헤딩슛의 세기가 워낙 강렬했기 때문에 박주영이 공의 타이밍을 늦게 읽은 것이 아쉬웠을 따름입니다. 하지만 박주영이 데미첼리스의 머리로 넘어오는 공의 궤적을 빠르게 파악했다면 자책골은 면할 수 있었습니다. 데미첼리스와 공중볼 경합을 벌일 수 있는 타이밍이 있었기 때문이죠. 박주영의 공중볼 능력은 프랑스리그에서 으뜸이라 할 수 있기 때문에 데미첼리스에게 밀릴 이유가 없었습니다. 박주영을 위로하고 싶지만, 아쉽게도 박주영에게 책임이 있었습니다.
5. 지나치게 메시에게 집중된 수비
한국의 1-4 대패가 아쉽게 느껴지는 이유는 세번째와 네번째 실점을 막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수비 밸런스를 적당하게 조절했다면 메시의 드리블 돌파를 통한 아르헨티나의 공격을 봉쇄할 수 있었는데, 두 번의 실점 상황을 보면 한국 수비수들이 지나치게 메시에게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미드필더들이 너무 공격쪽으로 몰리면서 후방 옵션들의 수비 부담이 커졌지만, 그 부담이 있더라도 수비수들의 위치가 매끄럽지 못했습니다. 그 틈을 파고든 이과인은 두번씩이나 한국 골망을 흔들었습니다.
6. 허정무, 교체 작전에서 마라도나에게 완패
한국은 0-2로 뒤졌던 전반 45분 이청용의 만회골을 통해 후반전 분위기를 유리하게 이끌고 갔습니다. 그래서 후반 시작과 함께 기성용을 빼고 김남일을 투입하면서 수비를 안정 시켰습니다. 그런데 한국이 후반전에 강화해야 할 곳은 공격 이었습니다. 아르헨티나의 압박에 밀려 맥이 풀린 공격을 일관했는데 후반 34분 이동국의 투입을 통해 변화를 줬습니다. 하지만 이동국 투입은 1-4로 뒤진 상태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아르헨티나가 후반들어 한국 수비에게 꽁꽁 막힌 테베스를 후반 28분에 빼고 아구에로를 투입하는 승부수를 띄운 것과 비교하면 이동국 투입 타이밍이 너무 늦었습니다. 허정무 감독이 교체 작전에서 마라도나에게 완패한 순간 입니다.
7. 허정무, 교체 작전에서 마라도나에게 완패(2)
그런데 허정무 감독의 후반 34분 교체 대상자도 잘못 됐습니다. 박주영 대신에 투입한 이동국은 교체 선수로서 승부를 뒤집을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합니다. 승부수에서 투입되는 공격 성향의 조커는 빠른 발과 절묘한 발재간을 통해 상대 수비진을 흔들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하는데(대표적으로 이원식, 솔샤르) 이동국은 그런 컨셉과 거리가 멉니다. 미들즈브러에서 두각을 떨치지 못했던 것도 이 때문이며 대표팀에서 유독 선발로 많이 투입된 것도 이 때문입니다. 굳이 박주영을 교체하려면 이동국보다는 이승렬과 안정환 같은 조커로서 경쟁력이 있는 선수들을 투입시켰어야 했습니다.
8. 염기훈 선발 투입이 부른 최악의 공격력
염기훈의 현재 폼을 놓고 보면 왼쪽 윙어로 투입하기가 부적절합니다. 그동안 고질적인 연계 플레이 부족에 시달렸지만 최근 부상 복귀 이후에는 볼 키핑력과 순발력이 떨어진 것이 눈에 쉽게 보입니다. 특히 스페인전과 아르헨티나전에서는 상대팀 선수들에게 공을 빼앗기는 모습이 여럿 노출 됐습니다. 여기에 연계 플레이 부족으로 유기적인 콤비 플레이를 엮어내기 힘든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측면이 중앙보다 공격의 돌파구를 마련하기 쉬운 공간임을 상기하면, 염기훈의 왼쪽 윙어 투입은 허정무 감독의 판단 미스 였습니다. 더욱이 한국은 역습을 컨셉으로 공격을 펼쳤기 때문에 효과적인 볼 배급을 할 수 있는 자원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염기훈은 그런 컨셉이 아닙니다.
9. 염기훈의 슈팅 실수
만약 염기훈이 후반 12분 역습 상황에서 확실하게 골을 넣었다면 한국이 2-2 동점에 성공했을 것입니다. 이청용이 오른쪽 진영에서 과감한 드리블 돌파를 통해 상대 수비망을 뚫고 역습을 가하면서 염기훈이 공을 받아 슈팅을 노렸는데, 골문 오른쪽에서 왼발 아웃사이드 킥을 날리는 실수를 범했습니다. 물론 왼발을 쓰는 선수이기 때문에 왼발 슈팅을 날렸을지 모를 일이지만 슈팅 각도가 좁아지면서 정확도가 떨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오른발로 빠르게 슈팅을 처리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역습을 펼쳤던 한국이 슈팅 기회가 많지 않았음을 상기하면 염기훈의 슈팅 실수가 패인으로 지적됩니다.
10. 전반전은 자신감 부족, 후반전은 지나친 자신감
한국은 아르헨티나전을 앞두고 이구동성 '이변을 일으키겠다'며 승리하겠다는 뜻을 내비쳤습니다. 그리스전에서 완승을 거둔 기세가 아르헨티나를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이어진 것이죠. 그런데 전반전에는 경기 전 각오와는 달리 자신감이 떨어진 모습을 보였습니다. 상대팀의 압박 및 측면 침투에 밀린데다, 몸도 무거웠고, 박주영의 자책골까지 더해지면서 주눅이 든 경기를 펼쳤죠. 전반 45분 이청용의 '뜬금 골'로 추격 분위기를 잡았고 후반 시작과 함께 김남일을 투입하면서 안정을 되찾는 듯 싶었습니다. 그런데 미드필더 대부분이 공격쪽으로 몰리는 상황이 연출된 것이 이과인에게 두 골을 내주는 빌미로 작용했습니다. 공격에 대한 지나친 자신감을 가졌던 것이 대량 실점 패배를 자초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