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아쉬운 패배 였습니다. 인터뷰에서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이변을 일으키겠다는 경기 전 각오와는 달리 실전에서는 몸이 무거웠고 특유의 빠른 움직임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후반들어 제 모습을 되찾는 듯 싶었지만 이미 발동이 늦었습니다. 전반 내내 아르헨티나의 운동 신경과 전방 압박에 밀려 기동력에서 밀린데다 수비 집중력까지 떨어졌습니다. 한마디로 자신감이 결여된 상태에서 경기를 치렀습니다.
만약 전반 15분 박주영의 자책골이 없었다면 경기를 쉽게 풀어갈 수 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듭니다. 한국은 박주영의 자책골 이전까지 아르헨티나의 공격을 상대로 압박을 강화하며 상대의 공격 템포를 늦추면서 공을 빼내기 위한 수비 작전에 만전을 기했습니다. 불운하게도 데미첼리스의 헤딩슛이 박주영의 발을 맞고 한국 골망으로 향하고 말았습니다. 박주영이 사전에 공의 흐름을 포착하여 데미첼리스와 공중볼 경합을 시도했다면 좋았을텐데, 워낙 데미첼리스의 슈팅이 빠르게 향하는 바람에 골키퍼 정성룡이 반응하기 전에 물이 엎질러지고 말았습니다.
이미 박주영의 자책골은 되돌리기 어렵습니다. 판정은 더 이상 번복될 수 없고 경기는 1-4로 한국이 대량 실점으로 무너진 상태에서 경기 종료 휘슬이 불었습니다. 그동안 한국의 공격수로서 상대 골망을 흔드는 것에 익숙했던 박주영의 자책골은 어찌보면 믿기지 않았습니다. 과거 한중일 프로 클럽 챔피언들이 맞붙었던 2004년 A3 챔피언스컵에서 김도훈이 자책골을 넣은 사례가 있었지만, 자책골은 수비수와 미드필더들이 기록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공격수가 낯설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가장 낯선 사람은 어쩌면 박주영 본인일지 모릅니다.
박주영은 자책골 이후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이고 말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비아냥과 질타를 받을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충격을 받을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2005년 대표팀과 K리그에서 많은 골을 넣으며 '축구 천재'라는 별명을 얻었으나 그 이후 많은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부상과 부진의 늪에 빠져 슬럼프에 빠졌던 경험이 있습니다. '박주영이 무슨 축구 천재냐?', '박주영은 거품이다'는 안티팬들의 반응이 빗발쳤고 심지어 FC서울(박주영 전 소속팀) 경기때는 원정 서포터석에서 박주영을 비방하는 '밥X영'이라는 플랜카드까지 등장했습니다. 결국에는 여론에서 축구 천재 논란까지 확대되고 말았습니다.(결국 박주영 별명은 '박 선생'으로 변경)
그런 어려움을 딛고 슬럼프에서 탈출했던 박주영이었기에 자책골의 시련은 본인도 원치 않았을 것입니다. 2008년 여름 허정무호에서의 부진으로 한때 국가 대표팀 발탁 명단에서 제외되었고, 베이징 올림픽에서 자신이 속했던 박성화호가 무기력한 부진으로 '축구장에 물채워라'라는 국민적인 비난을 받았지만 그 이후의 박주영은 AS 모나코에서 꿋꿋이 일어서면서 다시 한국 축구의 중심으로 떠올랐습니다. 특히 남아공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에서 한국의 7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 멤버로 활약하면서 한국 대표팀 부동의 공격수로 입지를 키우게 됐습니다.
하지만 박주영은 불운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바로 부상 때문입니다. 2005년 6월 우즈베키스탄-쿠웨이트로 이동하는 국가 대표팀 일정을 소화하자마자 U-20 월드컵을 위해 네덜란드로 향하면서 혹사 논란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U-20 월드컵 나이지리아전에서 왼쪽 팔꿈치 탈골 부상을 당한 이후 지금까지 6~7차례 탈골되었고 그 이후부터 부상이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올 시즌에는 3번의 햄스트링 부상을 비롯 총 6번의 부상에 시달렸고 월드컵 본선 직전에는 팔꿈치가 탈골되고 말았습니다. 그동안 힘들게 부상을 이겨내기 위해 노력했지만 자책골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악몽에 시달리면서 자기 자신을 괴롭힘 받게 됐습니다.
자책골 만큼이나 아쉬웠던 것은 아르헨티나전에서 제 기량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적었습니다. 미드필더들이 아르헨티나의 허리 싸움에서 밀린데다 수비 위주의 경기를 펼치다보니 골을 넣을 수 있는 여건이 좋지 못했습니다. 물론 공중볼 경합에서는 우위를 점했지만 팀 공격에 힘을 실어주기에는 4-2-3-1의 원톱이라는 환경적 조건 때문에 힘든 경기를 펼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만약 그런 기회가 자신에게 주어지면서 충분히 살렸다면 자책골의 악몽을 이겨내는 명예회복을 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명예회복을 벼르기에는 아르헨티나가 너무 강했습니다.
물론 박주영의 자책골이 안타까운 것은 사실입니다. 만약 그 자책골이 없었다면 한국이 원하는대로 경기가 풀렸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전처럼 여론의 혹독한 비난을 받게 되었지만 과거에도 사람들의 비아냥을 받았던 경험이 있기 때문에 선수 본인도 가시방석 같은 길을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더욱이 부상 악령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만큼 앞으로의 행보가 한편으로는 걱정되기도 합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박주영 만큼 우수한 기량을 지닌 공격수가 한국에 없다는 것입니다. 염기훈은 전형적인 공격수가 아니며 이승렬은 경험과 임펙트가 부족합니다. 안정환과 이동국은 빠른 공격을 펼치기에는 발이 느린데다 그동안의 폼이 꾸준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안정환의 능력은 높게 평가하지만 이미 전성기가 지났고 이동국은 굴곡이 심했기 때문에 신뢰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습니다. 물론 유병수와 김영후 같은 K리그의 우수한 공격 자원이 있지만 아직 이들은 국제 무대에서 충분한 경험을 쌓지 못했습니다. 거칠고 탄탄한 수비력을 자랑하며 공격수들이 골 넣기 힘든 리그로 유명한 프랑스리그에서 자리를 잡은 박주영을 공격수 No.1으로 꼽을 수 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박주영은 남아공 월드컵에서 한국의 주전 공격수로 올라서기까지 온갖 우여곡절을 겪으며 자신을 버리고 경기에 매진했습니다. 올해 25세의 박주영에게는 아직 미래가 있으며 풀럼-에버턴-에스턴 빌라 같은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팀들이 러브콜을 보내고 있을 만큼 출중한 기량을 갖춘 공격수입니다.
비록 박주영은 아르헨티나전 자책골로 힘든 시련을 겪게 되었지만 그 한 경기 때문에 좌절할 수는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한국 대표팀 부동의 공격수로 인정 받았던 선수였기 때문입니다. 자책골 충격을 이겨내지 못해 거듭된 불안에 시달리지 않도록 우리들이 힘을 실어줘야 할 것입니다. 또래 혹은 후배 선수들보다 깊고 혹독한 시련에 시달리며 힘든 축구 인생을 보냈다는 것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아직 박주영은 부상 후유증마저 이겨내지 못했습니다.
그런 박주영은 더 이상 울지 말아야 합니다. 오는 23일 나이지리아전에서 명예회복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며 이 경기에서 특별한 부상에 시달리지 않는 이상 선발 출전할 가능성이 큽니다. 한국에게 있어 나이지리아전은 16강 진출을 위해 반드시 이겨야 하는 경기이고 아르헨티나전 처럼 수비적인 경기를 펼치지 않을 것입니다. 박주영이 명예회복 할 수 있는 기회는 충분히 주어질 것으로 보입니다. 아르헨티나전에서 자책골을 넣었지만 이제는 경기에 더 집중해서 달라지는 모습을 보일 수 있기를 바라며 앞으로 오랫동안 한국 축구를 빛내는 공격수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나이지리아전에서 다시 시작하길 바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