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정무 감독이 이끄는 한국 축구 대표팀이 남아공 월드컵 16강에 진출하려면 '우승 후보' 아르헨티나를 반드시 이겨야 합니다. 아직 나이지리아전이 남아있지만 조기에 16강행을 확정지으려면 아르헨티나전에서 승부를 걸어야 합니다. 2004년 독일전 3-1 승리 이후 6년 동안 강팀을 제압하는 이변이 없었던 만큼 한국 축구의 저력을 세계에 떨쳐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아르헨티나와 정면으로 승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상대는 세계적인 강호이고, 공격적이고, 막강하고 화려한 공격 옵션들이 즐비하기 때문에 지난 그리스전처럼 공격적으로 승부하면 한국이 매우 불리합니다. 한국과 아르헨티나의 레벨 차이는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에 강팀을 제압할 수 있는 '맞춤형 전술'을 구사해야 합니다. 바로, 선 수비-후 역습 입니다. 수비 위주의 플레이를 통해 아르헨티나의 공격 흐름을 차단하면서 빠른 공수 전환에 의한 역습으로 상대의 허를 찔러야 합니다.
한국은 지난 그리스전에서 선제골을 비롯 빠른 드리블 돌파로 상대 진영을 맹렬히 흔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와 아르헨티나는 엄연히 다른 팀 입니다. 그리스가 수비에 무게감을 두는 팀 이라면 아르헨티나는 공격에 주안점을 둡니다. 또한 그리스가 수비 옵션들의 발이 느린 단점이 있다면 아르헨티나는 공격 옵션들의 콤비 플레이가 매끄럽지 못하며 디에고 마라도나 감독의 지략이 부족합니다. 한국이 그리스전에서 상대의 느린 발을 약점 삼았다면 아르헨티나전에서는 상대 공격 패턴의 약점을 공략해야 합니다. 얼마만큼 수비 조직이 견고하고 튼튼하게 버티느냐에 따라 아르헨티나전 결과가 드러날 것입니다.
특히 '세계 최고의 선수' 리오넬 메시(23, FC 바르셀로나. 이하 바르사)는 한국이 반드시 경계해야 할 인물입니다. 메시는 스스로 경기 흐름을 결정지을 수 있는 세계의 몇 안되는 선수이자 발군의 드리블 돌파 및 개인기에 경이적인 골 생산까지 자랑합니다. 그동안 국내 여론에서는 '메시를 어떻게 봉쇄해야 하냐?'며 아르헨티나전에 대한 걱정 또는 기대감을 가졌습니다. 그 적임자로 박지성(29,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이하 맨유)를 떠올리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박지성과 메시는 이미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를 통해 맞대결을 펼쳤던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공교롭게도 박지성은 2007/08시즌 챔피언스리그 4강 1~2차전에서 '메시 봉쇄맨'으로 활약했습니다. 바르사 3톱의 오른쪽 윙 포워드인 메시를 견제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수비에 가담하며 상대를 끈질기게 따라 붙었습니다. 때로는 4백 수비수들과 동일 라인에서 메시와 경합을 벌일 만큼 메시를 막기 위해 안간힘을 쏟아 부었고 여러차례 공을 빼앗아 역습을 전개 했습니다. 현지 언론에서 '수비형 윙어'라는 찬사를 받았던 것도 메시를 봉쇄했던 것이 결정타 였습니다.
메시의 드리블 돌파에 지나친 비중을 두었던 바르사는 박지성의 악착같은 견제에 의해 공격 템포가 느려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맨유 선수들의 압박 타이밍을 벌어주는 문제점을 남기면서 1~2차전 동안 단 한 골도 넣지 못했습니다. 결국 맨유가 박지성의 맹활약 및 폴 스콜스의 2차전 결승골에 힘입어 결승에 진출했습니다. 박지성이 메시와의 매치업에서 승리한 것입니다.
하지만 박지성은 2008/09시즌 챔피언스리그 결승 바르사전에서 메시 봉쇄맨으로 나서지 않았습니다. 2007/08시즌에는 4-4-2(1차전) 4-2-3-1(2차전)에서 왼쪽 윙어를 맡아 메시를 견제했으나 2008/09시즌에는 4-3-3의 오른쪽 윙 포워드로 뛰면서 메시와 경합을 벌일 기회가 없었습니다. 상대팀의 왼쪽 풀백 이었던 실비뉴와 매치업을 벌였으나 맨유는 대런 플래처의 퇴장 공백을 막지 못했고, 바르사는 맨유의 플래처 결장에 치명타를 입히기 위해 메시를 공격형 미드필더로 변형하는 제로톱을 구사하며 경기 흐름을 지배했습니다. 결국, 바르사는 메시의 헤딩골에 힘입어 2-0으로 승리하여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만약 맨유가 4-3-3을 버리고 박지성을 메시 봉쇄맨으로 활용했다면 경기 양상은 달랐을 것입니다. 당시 알렉스 퍼거슨 맨유 감독이 결승전 패배 원인을 자신의 전술 실패라고 아쉬워했을 정도로 박지성 활용에 대해서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하지만 퍼거슨 감독 입장에서는 루니-호날두의 공격력에 힘을 실어줄 수 있는 이타적인 공격 옵션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 적임자로 박지성을 택했습니다. 카를로스 테베즈가 당시 부진에 빠졌고 디미타르 베르바토프가 순간적인 드리블 돌파가 느리기 때문에 바르사전에 적합하지 않은 요인도 한 몫을 했습니다.
그런데 허정무 감독도 당시의 퍼거슨 감독과 비슷한 고민을 했을 것입니다. 박지성을 메시 봉쇄맨으로 활용할 수 있는데 공격쪽도 염두를 해야 하기 때문이죠. 박지성은 맨유 공격에 필요한 선수였고 한국 대표팀의 공격에서도 박지성이 필요한 선수입니다. 분명한 것은, 박지성은 한국의 에이스이자 공격에 없어서는 안 될 선수라는 것입니다. 박지성 같은 빠른 볼 처리에 의한 패스를 연결하고 특유의 종적인 움직임으로 상대 수비의 틈을 파고드는 선수가 있어야 한국의 공격이 원활하게 진행됩니다.
박지성은 맨유에서 조연이지만 대표팀에서는 주연입니다. 지난 시즌의 맨유로 치면 호날두 같은 비중을 대표팀에서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 선수에게 아르헨티나전에서 메시 봉쇄 임무를 맡기는 것은 공격력이 낭비되는 단점이 있습니다. 아르헨티나전에서 4-2-3-1을 구사할 가능성이 큰 한국 대표팀은 박지성 만큼 공격형 미드필더를 능숙하게 소화할 수 있는 선수가 없습니다. 김재성은 스페인전에서 그 역할을 맡았으나 부진했고 기성용은 패스를 끄는 타이밍이 문제입니다.
물론 박지성은 적극적으로 수비 가담을 펼치는 선수이기 때문에 메시를 비롯한 아르헨티나 선수들을 압박할 것입니다. 한국이 수비 위주의 플레이를 펼치더라도 공격 옵션들이 전방에서 압박을 펼쳐야 역습 기회를 노리거나 후방 옵션들의 수비 부담을 줄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4-2-3-1의 공격형 미드필더가 메시 봉쇄맨으로 나서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메시도 아르헨니타의 4-2-3-1에서 공격형 미드필더를 맡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김정우 또는 조용형이 메시와 경합을 벌일 가능성이 더 많습니다.
만약 박지성이 메시를 봉쇄하는 수비 위주의 플레이를 펼치면 한국의 공격력이 저하되는 단점이 있습니다. 맨유의 박지성은 수비형 윙어였지만 한국의 박지성은 수비보다 공격에 더 많은 비중을 실어야 하는 선수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메시를 막을 선수는 후방에 여럿 있습니다. 한국과 아르헨티나의 경기는 '박지성이 메시를 봉쇄할 수 있을까?'라는 접근 방식 보다는 '박지성과 메시 중에 누가 팀의 승리를 위해 얼마만큼 공격에 힘을 실어줄까?'라고 관전 포인트를 잡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분명한 것은, 한국은 메시와 상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메시 이외에도 테베즈-디마리아-이과인-베론-마스체라노 같은 세계 톱클래스 선수들과 상대합니다. 축구는 11명이 팀을 이뤄 상대팀과 겨루는 스포츠이기 때문에 메시를 아르헨티나의 팀원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아르헨티나의 막강한 공격력을 봉쇄하려면 대인방어 보다는 지역방어를 통해 견고한 압박 수비를 펼쳐야 할 것입니다. 박지성도 압박에 참여하겠지만 메시 봉쇄맨으로 두는것은 적합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