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일 남아공 월드컵이 개막하면서 우승 후보들의 명암이 엇갈리고 있습니다. 이미 본선 1차전을 치렀던 프랑스-아르헨티나-잉글랜드-독일의 온도차가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프랑스는 우루과이전에서 90분 동안 경기를 지배하고도 단 1골도 넣지 못하는 답답한 공격을 펼쳤고, 아르헨티나는 화려한 공격진과 달리 수비수 에인세의 한 골에 그친데다 나이지리아의 수비벽을 완전히 뚫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세계 축구계의 대표적 라이벌 관계인 잉글랜드와 독일의 행보는 매우 대조적입니다. 우선, 잉글랜드와 독일은 각각 미국과 호주를 상대로 슈팅-점유율-패스에서 우세를 나타냈습니다. 잉글랜드는 슈팅 16-11(유효 슈팅 8-7), 점유율 54-46(%), 패스 487-376(개, 패스 정확도 70-58%)로 미국을 앞섰습니다. 독일은 슈팅 16-8(유효 슈팅 6-6), 점유율 55-45(%), 패스 618-530(개, 패스 정확도 77-72%)로 호주보다 기록이 좋았습니다. 두 나라의 상대팀인 미국과 호주는 대회 전까지 16강 진출의 다크호스로 꼽혔기 때문에 레벨 차이가 적습니다.
잉글랜드vs독일, 두 우승 후보의 대조적인 온도차
그런데 잉글랜드는 미국에게 1-1로 비긴데다 전반 40분 골키퍼 로버트 그린이 클린트 뎀프시의 슈팅을 뒤로 흘리는 통한의 실점을 허용했습니다. 경기 흐름에서는 미국을 압도했으나 맥이 빠진 답답한 공격을 일관한 끝에 전반 4분 스티븐 제라드의 한 골에 그쳤습니다. 반면 독일은 호주를 4-0 대승으로 물리치면서 우승 후보의 저력을 과시했습니다. 짜임새 넘치는 공격 전개와 탄탄한 수비력, 4골을 터뜨리는 완벽한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잉글랜드의 문제는 골키퍼입니다. 공격과 수비에 걸쳐 세계 최정상급 선수들이 즐비하지만 골키퍼는 항상 그렇지 못했습니다. 특히 데이비드 시먼이 2002년 한일 월드컵 이후에 은퇴하면서 부터 골문을 든든히 책임질 수 있는 존재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시먼은 2002년 한일 월드컵 8강 브라질전에서 호나우지뉴의 프리킥 낙하 지점을 놓치는 불운에 충격을 받아 은퇴했습니다. 그 이후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는 데이비드 제임스, 유로 2008 유럽 예선에서는 폴 로빈슨이 치명적인 실책을 범했고 남아공 월드컵에서는 그린이 '잉글랜드 골키퍼 실책 계보'를 이어갔습니다.
특히 시먼이 은퇴한 이후 8년 동안 제임스, 로빈슨, 그린을 비롯해 크리스 커클랜드, 스콧 카슨, 벤 포스터 등이 잉글랜드 골키퍼 붙박이 주전을 노렸으나 모두 믿음감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대표팀 골키퍼로서 경험 부족의 한계를 이기지 못했는데 경쟁 자원들이 많다보니 오히려 믿고 쓸 수 있는 자원을 키우지 못했습니다. 지난해 8월 잉글랜드 국적을 취득한 스페인 출신의 마누엘 알무니아는 스페인 대표팀 경력이 없었으나 파비오 카펠로 감독이 발탁을 반대했습니다. 그런데 알무니아도 이중국적자가 된 이후로 아스날에서 기복이 심한 선방을 일관하며 기량이 퇴보했습니다.
잉글랜드의 문제는 골키퍼 뿐만이 아닙니다. 미국전에서 답답한 공격을 펼친 원인은 제라드-램퍼드로 짜인 중앙 미드필더 조합의 공존 실패 였습니다. 월드컵 본선 이전까지는 제라드-배리-램퍼드-레넌(베컴, 월컷)으로 짜인 미드필더 체제를 구성했습니다. 그런데 가레스 배리가 지난달에 발목 부상을 당하고 마이클 캐릭이 올 시즌 후반에 갑작스런 슬럼프에 빠지면서 프랭크 램퍼드의 짝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미국전에서 제라드-램퍼드를 중원에 배치했으나 한 박자 느린 공격 템포 및 매끄럽지 못한 공수 전환을 일관하며 맥클라렌 전 감독 체제 시절의 무기력한 행보가 월드컵 본선에서 되풀이 됐습니다.
그런데 제라드의 중앙 배치는 또 다른 문제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제임스 밀너가 왼쪽 윙어를 맡았는데 미국전에서 상대 수비수들에게 발이 묶이면서 전반전이 끝나기 전에 질책성으로 교체되는 수모를 당했습니다. 밀너 대신에 교체 투입한 숀 라이트-필립스는 미국전 이전까지의 컨디션이 많이 올라온 상태였으나 문제는 그동안 오른쪽에서 활동하면서 왼쪽에 대한 적응도가 미숙했습니다. 오른쪽 윙어였던 애런 레넌의 드리블 돌파로 공격의 실마리를 푸는 듯 했으나 미드필더진의 부조화 때문에 유기적인 콤비 플레이를 엮어내지 못했고 오히려 미국의 빠른 역습에 흔들리는 불안함을 노출했습니다.
잉글랜드의 또 다른 고민은 웨인 루니 입니다. 루니는 올해 3월까지 잉글랜드 대표팀과 맨유에 걸쳐 거의 매 경기 골을 넣는 불꽃 화력을 과시했으나 그 이후 발목 부상 및 피로누적 여파로 아직까지 컨디션을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올 시즌 맨유에서 많은 경기를 뛴데다 대표팀 일정까지 소화하는 강행군에 시달려 과부하에 빠진끝에 아직까지 폼이 살아나지 않고 있습니다. 잉글랜드에 믿을만한 득점 자원이 루니에 불과함을 상기하면, 앞으로의 행보가 우려됩니다.
반면 독일의 호주전 대승은 세대교체의 힘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메수트 외칠, 토마스 뮬러, 홀거 바트슈투버, 사미 케디라, 마르코 마린 같은 23세 이하 영건들이 자신의 기량을 맘껏 발휘한 끝에 독일의 4-0 대승을 이끌었습니다. 특히 외칠-뮬러-마린 같은 신예들은 힘과 조직력의 조화를 강조했던 전차군단의 색깔을 창의적으로 바꾼 주역으로 거듭났습니다. 세 명의 선수 모두 순간적인 빠른 드리블 돌파와 감각적인 개인기, 날카로운 패싱력으로 무장하여 독일 축구의 예술성을 강화했습니다. 물론 세 명 모두 지금까지 독일 축구를 지배했던 선배들과는 다른 타입에 속합니다.
그 중에 외칠은 4-2-3-1의 공격형 미드필더로서 빠른 볼 처리에 의한 날카로운 패스와 유연한 공격 조율을 과시했으며, 전반 8분 루카스 포돌스키-전반 26분 미로슬라프 클로제-후반 22분 뮬러의 골 과정에 기여를 했습니다. '정신적 지주' 미하엘 발라크의 불참 공백을 고민하던 독일은 외칠의 맹활약을 통해 더 이상 발라크를 그리워하지 않게 됐습니다. 뮬러는 바이에른 뮌헨에서 투톱 공격수와 왼쪽 윙어를 오가는 선수인데 호주전에서는 오른쪽 윙어 역할까지 능숙하게 소화했고 후반 22분 A매치 데뷔골까지 넣었습니다. 또 다른 윙어 자원인 마린은 교체 멤버로서 14분 뛰었지만 경쾌한 몸놀림을 선보이며 앞으로의 활약을 기대케 했습니다.
케디라는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와 함께 더블 볼란치를 맡아 호주 공격을 철벽같이 봉쇄했습니다. 상대 공격 예상 지점을 미리 선점하는 빼어난 위치선정을 비롯해 공격과 수비 영역을 폭 넓게 움직이는 투철함을 뽐내며 궂은 역할을 성실히 이행한 끝에 호주의 팀 케이힐을 봉쇄했습니다. 왼쪽 풀백으로 출전한 홀거 바트슈투버는 호주의 오른쪽 윙어 브렛 에머턴을 철저히 막아낸 것을 비롯 센터백과 함께 빼어난 커버 플레이를 펼치며 독일의 승리에 힘을 실어줬습니다.
그래서 독일은 영건들의 호주전 맹활약을 통해 월드컵 본선을 순조롭게 보낼 수 있는 큰 활력소로 자리매김 할 것입니다. 물론 이들은 A매치 경험이 부족하지만 호주전을 통해 월드컵의 온기를 체험하며 거침없이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여기에 클로제가 호주전에서 독일의 원톱을 맡아 골을 확실히 책임졌고 왼쪽 윙어인 포돌스키까지 득점력에 힘을 실어주면서 앞으로의 막강 화력을 기대케 했습니다. 여기에 골키퍼 마누엘 노이어의 선방과 안정된 수비 조직력까지 빛을 발하면서 남아공 월드컵 우승의 자신감을 얻게 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