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축구

그리스는 B조의 승점 자판기로 전락할 것

 

오토 레하겔 감독이 이끄는 그리스 축구 대표팀의 현실적인 1승 상대는 한국 이었습니다. 한국전이 남아공 월드컵 B조 본선 첫 경기인데다 다음 경기가 나이지리아-아르헨티나 같은 까다로운 상대들과 맞붙기 때문입니다. 유일하게 월드컵 본선에 참가했던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 3전 3패 무득점에 그쳤던 과거가 있기 때문에 한국전 승리에 대한 의지가 분명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한국전에서 드러난 그리스의 실력은 월드컵 16강에 진출할 수 있는 클래스가 아니었습니다. 공수 양면에 걸쳐 한국을 압도하는 모습이 부족했고 레하겔 감독의 벤치 실수까지 두드러 졌습니다. 한국전에서 전력적인 약점만 잔뜩 노출했기 때문에 앞으로 본선에서 상대할 나이지리아-아르헨티나에게 '그리스 공략법'을 스스로 제출하는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대로라면 그리스는 1승은 커녕 B조의 '승점 자판기'로 전락할지 모릅니다.

한국전에서 드러난 그리스의 문제점은?

특히 그리스의 레벨은 한국 보다 한 수 아래 였습니다. 볼 점유율은 50-50(%)로 대등했으나 후반 초반까지는 한국에게 열세를 드러냈습니다. 전체 슈팅에서 6-11, 유효 슈팅 2-7(개)로 뒤지면서 좀처럼 한국 수비를 위협하지 못했습니다. 특히 전반 7분 기성용의 왼쪽 프리킥 상황에서 이정수의 골문 침투를 예상하지 못해 논스톱 선제골을 허용하면서 경기 분위기는 일순간에 한국이 주도했습니다. 경기 초반부터 한국의 빠른 기습에 흔들렸던 그리스는 시간이 지날 수록 맥이 빠진 공격을 펼치면서 한국을 압도하는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 이유는 느린 공수 전환 및 수비수들의 느린 발이 주 원인 이었습니다. 박지성-박주영-염기훈-이청용으로 짜인 한국의 공격 옵션 및 기성용-차두리에게 쉴세없이 빠른 공격 침투를 허용하면서 후방 옵션들의 수비 부담이 많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한국 선수들이 그리스의 고질적인 약점을 물고 늘어지며 경기를 펼쳤음을 의미합니다. 특히 미드필더들은 공격적인 전진 배치보다는 후방쪽을 의식하면서 사마라스-게카스-하리스테아스로 짜인 스리톱쪽으로 종패스를 연결할 수 있는 기회를 잃었고 공격수와의 간격이 벌어지면서 공격 밸런스가 깨지는 문제점이 드러났습니다.

그리스의 무기력한 수비력은 유로 2004 우승 당시 철통같은 수비 조직력을 자랑했던 시절과 대조적 이었습니다. 한 가지 눈여겨 볼 것은 수비 숫자가 서로 다릅니다. 유로 2004 시절에는 3백(3-4-3)으로 재미를 봤지만 남아공 월드컵에서는 4백(4-3-3)으로 한국전에 임했습니다. 3백을 구사하면 수비수들의 느린 발 약점을 감추고 미드필더와 철저한 압박을 펼칠 수 있는 이점이 있는데, 레하겔 감독은 주전 수비수였던 소티리오스 키르기아코스를 벤치로 내리는 4백을 구사했습니다. 키르기아코스가 발이 느리기 때문에 박주영-염기훈 투톱을 막을 수 있는 적임자로 부적합했다는 것이 레하겔 감독의 판단 이었습니다.

그러나 레하겔 감독의 판단은 틀렸습니다. 그리스 수비수들 특성상 4백 소화가 불가능한 편인데 한국전에서 4백을 고집하는 전술 미스를 범했습니다. 그리스 수비수들은 강력한 대인방어와 공중볼 장악능력을 자랑하는 편이기 때문에 수비 밸런스 유지와 공간 커버에 강한 4백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유로 2004에서 우승할 수 있었던 것도 3백의 대인방어를 기반으로 미드필더진이 적극적인 수비 가담을 통한 압박을 펼치며 상대 공격을 봉쇄하는 수비력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그리스는 한국전에서 유럽 최고 수준의 대인방어와 높이를 뽐내지 못하고 무너졌습니다.

공격 전개도 문제 였습니다. 짧은 패스와 2대1 패스를 통한 빠른 공격 전개 보다는 장신 공격수를 활용한 롱볼 축구를 구사하면서 비효율적인 공격 전개를 거듭했습니다. 그리스는 그동안 미드필더들이 적극적인 수비 가담을 펼치면서 기오르기오스 사마라스(193cm) 앙겔로스 하리스테아스(191cm) 같은 큰 키를 앞세운 좌우 윙 포워드에게 롱볼이 향할 수 밖에 없습니다. 두 선수가 머리로 공을 받아내면 최전방을 맡는 세오파니스 게카스에게 빠른 볼 터치에 의한 골 기회를 밀어주는 단조로운 공격 형태를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이 작전이 한국에게 그대로 먹혔습니다. 미드필더진이 한국의 빠른 공격 침투에 공략당하면서 우왕좌왕 거리더니 세 명의 공격수와 간격이 벌어지는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여기에 세 명의 공격수 사이에서도 한국 포백의 철저한 커버 플레이에 막히면서 간격이 벌어졌고 패스가 끊어졌습니다. 결국, 어느 누구도 한국 진영에서 상대 수비를 위협하는 움직임을 발휘하지 못하면서 후반 중반에 사마라스-하리스테아스가 0-2로 뒤진 상황에서 질책성 교체 됐습니다. 오랫동안 롱볼에 의존했던 그리스의 공격은 상대팀들의 먹잇감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것을 한국전을 통해 드러났습니다.

한국전에서 완패한 그리스의 최대 고민은 나이지리아-아르헨티나전 입니다. 두 팀은 공격수와 미드필더들이 빠른 돌파력을 앞세워 상대팀 전방을 파고드는 특성이 최대 강점 입니다. 나이지리아가 아프리카 특유의 폭발적인 탄력을 자랑한다면 아르헨티나는 화려한 발재간을 통해 상대 수비를 파고들며 공격 기회를 마련합니다. 특히 아르헨티나는 2대1 패스와 대각선 패스를 통해 상대 수비 뒷 공간을 공략하는 창조적인 플레이가 압권입니다. 한국전에서 빠른 침투에 공략당한 그리스라면 두 팀과의 경기에서 실점할 것이 분명합니다.

물론 그리스가 4백에서 3백으로 돌아서면 실점 허용을 줄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최근 평가전 및 한국전에서 4백을 연마했기 때문에 3백으로 전환하기에는 선수들의 감각 부족이 우려되는데다 타이밍도 늦은감이 있습니다. 여기에 미드필더들의 수비 전환 속도가 늦기 때문에 상대팀의 빠른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흔들릴 가능성이 있습니다. 존 오비 미켈이 빠진 나이지리아의 헐거워진 중앙 공격이면 모르겠지만 선수층이 두꺼운 아르헨티나라면 이야기가 다릅니다.

또한 롱볼 공격도 나이지리아-아르헨티나전에서 통한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현대 축구는 패스 게임을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팀들이 선전하는 흐름입니다. 메이져 대회 우승과 인연 없었던 스페인이 유로 2008에서 우승하면서 현대 축구는 패스 흐름을 중요시합니다. 한국의 전술 업그레이드는 패스 게임 정착이 있었기에 가능했고 프랑스가 몰락하는 원인은 비효율적인 패스 남발에 있었습니다. 그리스는 남아공 월드컵에서 16년 만의 월드컵 본선 무대를 밟았지만 유로 2004의 영광을 재현하기에는 현실적으로 매우 힘듭니다. 만약 나이지리아전에서 패하면 16강 진출이 실패하는 것과 동시에 B조의 승점 자판기로 전락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