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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한국 축구, 더 이상 세계 변방이 아니다

 

한국 축구는 2002년 한일 월드컵 이전까지 '유럽 징크스'에 시달리며 세계의 벽을 넘지 못했다는 여론의 비판을 줄곧 받아왔습니다. 2001년 프랑스-체코에게 0-5로 대패한 것을 비롯 유독 유럽팀과 상대하면 맥 없이 약한 모습을 보였던 것이 한국 축구의 과거 였습니다. 심지어 A매치에서는 상대팀 박스 앞으로 전진하면 새가슴이 되면서 부정확한 슈팅을 남발하거나 상대 수비수를 과감히 제치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 였습니다.

국제 대회에서 뚜렷한 족적을 세우지 못했던 한국 축구는 거스 히딩크 감독의 철저한 조련끝에 그동안 숨겨졌던 잠재력이 폭발하면서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 신화를 달성했습니다. 문제는 그 이후 였습니다. 쿠엘류-본프레레-아드보카트-베어벡으로 이어지는 잦은 외국인 감독 교체, 오만-베트남-몰디브 같은 아시아 약체 국가들에게 패하거나 또는 무기력한 경기를 거듭하는 답답한 행보를 걸으면서 2002년의 영광을 이어가지 못한 성장통에 빠졌습니다. 2008년 9월 북한과의 남아공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1차전까지만 하더라도 한국 축구의 졸전은 거듭됐습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한국 축구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대표팀을 기준으로 하면, 지난해 U-20 월드컵과 U-17 월드컵 동시 8강 진출의 쾌거를 달성하면서 한국 축구가 세계 무대에서 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됐습니다. 그동안 본선 탈락이 즐비했던 세계 청소년 대회에서의 선전은 한국 축구의 미래를 밝게 만드는 요인이 됐습니다. K리그에서는 지난해 포항이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비롯 국제축구연맹(FIFA) 클럽 월드컵 3위에 오르면서 '세계 클럽 3위'의 명예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올 시즌 AFC 챔피언스리그에서는 수원-포항-성남-전북이 동시 8강에 진출하면서 동아시아 축구의 패권을 장악했습니다.

그리고 허정무호는 2008년 10월 박지성을 주장으로 선임한 이후부터 본격적인 질적 성장을 달렸습니다. 박지성은 맨유의 주축 선수로서 팀을 위해 열심히 뛰는 성실함을 인정 받았습니다. 그래서 젊은 선수들이 박지성과 함께 호흡하면서 경기력 발전에 자신감을 얻게 됐습니다. '쌍용'으로 일컫는 이청용-기성용은 기술적으로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을 보이면서 한국 전력의 새로운 활력소로 거듭났고, 박주영은 침체기를 이겨낸 끝에 한국 공격에 없어선 안 될 부동의 공격수로 떠올랐습니다. 오범석-김보경-이승렬 같은 또 다른 젊은 선수들도 주눅들지 않는 자세를 보이면서 자신의 기량을 맘껏 발휘했습니다.

또한 박지성이 맨유라는 유럽 빅 클럽에서 맹활약을 펼치면서 다른 한국인 선수들이 유럽에 진출하는 경우가 부쩍 늘었습니다. 독일 월드컵 이후 프리미어리그에 입성한 한국인 선수는 총 5명(설기현-이동국-김두현-조원희-이청용)이며 그 외에 프랑스(박주영) 스코틀랜드(기성용)에 진출하고 또 다른 선수들이 유럽 클럽의 관심을 받게 됐습니다. 조용형은 잉글랜드의 풀럼-뉴캐슬을 비롯해 스페인과 이탈리아 클럽의 영입 관심을 받았으며, 김재성은 네덜란드 PSV 에인트호벤의 영입 대상에 포함된 것으로 알려 졌습니다. 지난 1월에는 김형일이 잉글랜드 버밍엄 시티 이적설로 주목을 끌었습니다.

비록 몇몇 선수들이 유럽 정착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2009/10시즌에는 이청용-박주영이 유럽에서 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실력으로 입증했습니다. 이청용은 볼턴에 입단한지 얼마 되지 않아 팀의 에이스로 떠오르면서 '세계 최고의 리그'로 손꼽히는 프리미어리그에서 특출난 기교와 빠른 순간 돌파력을 선보이며 리버풀의 영입 대상으로 떠올랐습니다. 박주영은 불과 몇년 전까지 몸싸움이 약하다는 혹평을 받았으나 유럽에서 거칠기로 유명한 프랑스리그에서 거구들과 몸싸움을 즐기며 공중볼에서 우위를 점하는 만능형 공격수로 변신했습니다. 이제는 AS 모나코의 타겟맨으로 활약하면서 '박주영=쉐도우 스트라이커'라는 공식을 무너뜨렸습니다.

지난 1월 위건에서 수원으로 임대된 조원희는 "영어를 배운후에 프리미어리그에 진출하라"며 유럽 진출을 꿈꾸는 영건들에게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비록 위건에서 실패하고 국내로 임시 리턴했지만, 조원희의 실패는 한국 선수들이 프리미어리그를 비롯한 유럽 클럽에서 성공할 수 있는 노하우를 터득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물론 이청용-박주영은 유럽에 진출한지 첫 시즌 만에 성공적인 행보를 걸었지만, 한국인 선수가 능통한 영어를 옵션으로 유럽에 진출하면 순조로운 현지 적응을 보내며 유럽 성공에 자신감을 얻을 것입니다. 유럽 진출 및 성공 사례가 늘어나는 만큼, 한국과 유럽 축구 사이의 벽이 점점 낮아질 것입니다.

유럽과 가까워진 한국 축구는 국가 대표팀이 '유럽 징크스'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불과 몇년 전까지 유럽과의 경기에서 의기소침한 모습을 보이더니 이제는 '이길 수 있다'는 승리욕으로 무장했습니다. 특히 남아공 월드컵 본선 1차전 그리스전에서는 공수 양면에 걸친 완벽하고 치밀한 경기 운영을 펼쳐 상대의 힘과 높이를 제압한 끝에 2-0 완승을 거두었습니다. 그 이전에도 유럽 클럽을 상대로 승리하고 선전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그리스전은 한국 축구가 유럽 징크스라는 꼬리표를 완전히 떼는 계기로 작용했습니다.

허정무호는 개인의 능력과 조직의 힘이 유기적인 조화를 이루며 전력적인 균형을 맞췄습니다. 선수 개인의 능력을 놓고 보면 그리스-나이지리아보다 우세하며 아르헨티나에 쉽게 밀려나지 않을 역량을 갖췄습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 전사, 귀네슈-파리아스의 아이들, 해외파, 지난해 U-20 월드컵 8강 진출의 주역들을 비롯 그동안 K리그에서 검증되었던 자원들이 서로 한 팀에 모였습니다. 허정무 감독은 2008년과 2009년, 그리고 올해도 세대 교체를 거듭하며 스쿼드의 질적인 성장을 꾀했고 그 결실이 그리스전에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의 최대 강점은 팀 플레이입니다. 개인 기량에 의존하기 보다는 모든 선수들이 서로 똘똘 뭉쳐 단합된 마음으로 상대 공격을 봉쇄하고, 공격 과정에서 유기적인 콤비 플레이를 펼치는 조직력을 팀 전력의 근간으로 삼았습니다. 특히 지난 4일 '월드컵 우승후보' 스페인과의 평가전에서는 비록 0-1로 패했으나 86분 동안 실점을 허용하지 않는 수비 조직력을 과시하며 강팀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는 자신감을 성취했습니다. 스페인전에서의 선전은 월드컵 본선 무대에서 아르헨티나를 비롯한 강팀들을 상대로 이변을 일으킬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이러한 한국 축구의 최근 행보를 놓고 보면 더 이상 세계 변방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국 축구는 7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에 성공할 만큼 월드컵 무대 단골 손님으로 떠올랐고 2002년 한일 월드컵 이후의 위기를 넘어 다시 영광의 역사를 쓰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월드컵 1승이 간절했으나 이제는 월드컵 1승을 기본으로 16강에 진출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불과 몇년 전까지는 유럽 축구에서 두각을 떨친 한국인 선수가 없었으나 이제는 유럽에서 롱런을 거듭했던 한국인 선수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 신화가 한국 축구의 숨겨졌던 잠재력이 폭발했던 계기로 작용했다면, 남아공 월드컵은 한국 축구가 본격적인 축구 강국으로 진입하는 터닝 포인트가 될 것입니다. 그리스전에서의 완벽한 승리가 아르헨티나-나이지리아전에서 재현되면 토너먼트 무대에서 선전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할 것이며 한국 선수들은 그럴 능력이 충분합니다. 이영표가 얼마전 "지금의 대표팀이 역대 최고"라고 말한 것 처럼, 남아공 월드컵에 출전한 태극 전사들은 8년 전 4강 신화에 이은 또 하나의 기념비적인 업적을 거둘 것임에 틀림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