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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박주영 부진, 다비드 비야와 대조되는 이유

 

4-2-3-1은 원톱 공격수의 파괴력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원톱이 빛나려면 공격수의 변화무쌍한 경기력도 중요하지만 미드필더들의 활발한 공격 지원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4-2-3-1은 4선 포메이션이고 공격수가 단 한 명이기 때문에 원톱이 고립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3과 1 사이의 유기적인 콤비 플레이가 필수적이며 후방에서 전방으로 찔러주는 날카로운 논스톱 패스와 크로스도 필요합니다. 후방 패스를 받아내는 공격수의 민첩성과 위치선정 또한 간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국과 스페인의 공격력이 서로 엇갈린 결정적 이유는 원톱을 활용하는 능력 이었습니다. 후반 11분 이전까지는 4-2-3-1의 한국이 4-1-4-1의 스페인을 상대로 허리에서 대등한 접전을 펼쳤고 상대팀의 원톱인 페르난도 요렌테를 잘 묶었습니다. 하지만 스페인이 후반 11분 공격수와 미드필더 6명 중에 4명을 교체하고 4-2-3-1로 전환하면서 경기의 양상이 스페인쪽으로 기울어졌습니다. 원톱으로 출전한 다비드 비야를 활용한 공격 물줄기를 통해 경기 흐름을 장악했고 그 분위기 속에서 후반 39분 헤수스 나바스가 오른발 중거리포로 결승골을 넣었습니다.

스페인 입장에서는 한국전을 이겨야 했습니다. 남아공 월드컵 우승을 향한 분위기를 고조시키려면 평가전에서 승리를 챙기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죠. 물론 평가전은 평가전에 불과하지만 레벨이 낮은 팀을 상대로 비기거나 패하는 것은 강팀 입장에서 앞날 행보가 부담됩니다. 그래서 백업 멤버 대부분을 한국전 선발로 기용했으나 공격이 뜻대로 풀리지 않자 후반 11분에 비야-사비-알론소 같은 주전 멤버들을 투입하고 신예 페드로까지 동시에 출전시키는 초강수를 두었습니다. 후반 11분 이후에 비야를 중심으로 놓는 공격 패턴을 통해 본색을 드러낸 것이죠.

특히 비야는 34분의 짧은 출전 시간 속에서도 원톱으로서 인상깊은 공격력을 펼쳤습니다. 한국 수비 뒷 공간을 파고들어 2선 미드필더들의 침투 기회를 열어주거나, 후방 옵션에게 패스 받을때의 움직임이 능동적 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박스 안에서 공을 잡는 즉시 슈팅을 노리는 동작은 전형적인 킬러의 아우라를 풍겼습니다. 비록 골을 넣지 못했지만 한국 진영의 간담을 서늘케 한 것은 분명합니다. 특히 나바스의 오른쪽 크로스가 올라올 때 한국 센터백들 사이에서 공의 낙하 지점으로 다가가 마크맨을 따돌리고 슈팅 기회를 날리는 민첩함과 위치선정이 인상적 이었습니다.

비야에게 여러차례 골 기회가 주어진 이유는 미드필더들이 한국 진영으로 완전히 넘어왔기 때문입니다. 후반 11분 이전까지의 4-1-4-1은 홀딩맨 마르티네스, 공격형 미드필더 파브레가스-이니에스타 사이의 공간이 벌어졌기 때문에 수비 가담이 잦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후반 11분 4-2-3-1로 전환한 이후에는 마르티네스-알론소로 짜인 더블 볼란치 조합이 하프라인을 넘은 상태에서 공격 성향의 경기를 펼치면서 페드로-비야-사비-나바스가 한국 진영에서 충분한 골 기회를 노렸고 후반 35분 점유율에서 75-25(%)로 앞설 수 있었습니다.

스페인의 공격 패턴이 빠르게 변화한 원인은 경기 초반부터 미드필더진을 장악했기 때문입니다. 후반 11분 이전까지 한국의 지역 방어에 고전했지만 허리 싸움에서는 스페인이 우세였습니다. 한국 미드필더들이 공격 과정에서 잦은 패스미스, 무리한 드리블 돌파에서 비롯된 커팅 허용, 볼 키핑력 부족으로 고전을 면치 못하면서 스페인이 공격 주도권을 손쉽게 가져갔습니다. 그 흐름이 후반전까지 지속적으로 유지되면서 공격 패턴의 다양화를 유도했고 비야가 결정적인 공격 기회를 마련했습니다.

한국도 스페인을 이기겠다는 마음이 충만했을 것입니다. 강팀을 상대로 승리하면 월드컵 본선에 대한 자신감을 성취하기 때문에 이번 경기에서 물러서지 않으려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선 수비-후 역습을 통해 압박 인원을 늘려 스페인의 공격 템포를 늦추고 커팅을 시도한 뒤 반격을 노리는 전술로 경기에 임했고 적어도 수비에 있어서는 후반 39분 나바스에게 실점하기 전까지 성공적 이었습니다. 특정 선수를 끈질기게 마크하는 대인 방어보다는 철저한 공간 분담과 협력 수비를 원칙으로 하는 지역 방어를 통해 스페인의 공세를 끊으려 했습니다.

문제는 수비에서 공격으로 전환하는 역습 속도가 늦었습니다. 2선 미드필더중에 누군가가 종적인 움직임을 통해 역습 기회를 노리면서 박주영에게 골 기회를 밀어줘야 하는데 어느 누구도 그런 움직임이 꾸준하지 못했습니다. 염기훈은 허정무 감독에게 지적을 받았던 순발력 부족을 이겨내지 못했고 김재성은 공격형 미드필더로서의 위치선정이 매끄럽지 못했고 과감한 움직임도 부족했습니다. 그리고 두 선수 모두 볼 키핑 불안에 시달리며 상대에게 공을 빼앗기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이렇다보니, 한국은 스페인에 비해 미드필더진에서 차근차근 공격을 풀어가는 모습이 부족했고 2선과 박주영 사이에서의 유기적인 콤비 플레이가 저조했습니다.

물론 박지성 공백이 아쉬운 것은 사실입니다. 박지성의 역습 능력은 맨유에서 충분히 입증되었기 때문에 그의 실력을 의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4-2-3-1에서는 어느 한 선수의 역습 능력 보다는 3명의 2선 미드필더가 서로 일심동체가 되어 패스를 연결하고, 패스 공간을 확보하고, 상대 압박을 덜어내는 공간 싸움을 통해 조직적인 패스워크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특히 역습을 펼치는 팀이라면 전방으로 올리는 빠른 볼 처리 및 공수전환을 통해 상대 수비의 허를 찔러야 하는데 스페인에게 개인 기량 및 조직력에서 밀리는 바람에 박주영이 어쩔 수 없이 고립되었습니다.

결국, 박주영은 한국 미드필더들의 미숙한 공격 운영과 점유율 열세 끝에 충분한 골 기회를 얻지 못하고 부진했습니다. 이러한 경기력은 미드필더들의 활발한 지원에 힘입어 박스 안에서 강렬한 인상을 심어줬던 비야와 상반된 모습을 보였습니다. 물론 한국과 스페인은 엄연한 실력 차이가 있지만 미드필더의 중요성을 간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한국은 스페인전에서의 경험을 통해 역습의 효율성을 키워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됐습니다.

그렇다고 박주영의 부진을 오로지 미드필더 탓으로 돌릴 수 없는 일입니다. 박주영이 최전방에서 스스로 공격을 해결하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이 AS 모나코 소속으로 뛰었던 시즌 후반에 이어 이번 스페인전에서 다시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2선 미드필더들의 공격력 부족을 커버하기 위해 직접 2선으로 내려가 동료 선수들과 간격을 좁히면서 패스 플레이를 유도하는 움직임이 지속적이지 못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또 다른 후방 옵션이 전방으로 침투하면서 2차, 3차 공격 기회가 열렸을텐데 연계 플레이 부족의 아쉬움을 떨치지 못했습니다.

물론 전반 44분 스페인 골문으로 과감히 치고드는 상황에서 이청용과의 2대1 패스를 통해 슈팅을 날렸던 장면은 좋았습니다. 슈팅이 골키퍼 레이나의 선방에 걸렸지만 그 장면을 만들어내는 과정은 인상적 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모습들이 실제보다 더 많았다면 어쩌면 한국이 스페인전에서 한 골을 넣을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아쉬움이 듭니다. 풀타임 출전했으나 부진했던 박주영은 34분 동안 팀 공격의 구심점 역할을 충분히 해냈던 비야의 경기력을 통해 앞날의 맹활약을 위한 좋은 경험을 했을 것입니다. 월드컵 본선에서 박주영의 공격력이 빛을 발하면 한국의 16강 꿈은 현실이 될 것이 분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