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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월드컵, 강팀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언젠가부터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1등은 되고 2등은 안된다'는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문구죠. 지금은 세상이 좋아지면서 무조건 1등해야 한다는 논리가 완화되었지만, 2등보다 1등을 좋아하거나 약자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는 사람들의 마음은 여전합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2등과 약자에 대한 관심이 없거나 그들을 바라보는 싸늘한 시선이 우리들 가슴속에 깊게 존재합니다.

인생의 축소판으로 불리는 축구판도 마찬가지 입니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가 국내에서 높은 인기를 끌고 있지만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이탈리아 세리에A 같은 또 다른 리그들은 '2인자'라는 꼬리표가 달라 붙었습니다. 프리미어리그가 세계 최고의 리그이기 때문에 나머지 리그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반응이 생긴 것이죠. 며칠전 박지성이 바이에른 뮌헨 이적설에 직면했을때는, '뮌헨은 듣보잡'이라는 반응을 인터넷 기사 댓글에서 접한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뮌헨은 박지성이 소속된 맨유를 8강에서 제압한 것을 발판삼아 결승까지 진출했습니다. 엄연히 독일 최고의 명문 클럽인데 국내에서는 프리미어리그 열풍 때문에 소위 '듣보잡' 취급 당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리에A는 한때 세계 최고의 리그였으나 이제는 독일 분데스리가에게 유럽 빅3리그 자리를 내줘야 하는 위기에 처했습니다. 수원은 2년 전 K리그 독주 체제를 달렸으나 지금은 꼴찌로 주저 앉아 타팀들의 '승점 자판기'로 전락했습니다. 그 대신, 전북-경남-전남 같은 한때 중위권 레벨의 팀들이 급성장하면서 K리그의 신선한 이슈를 제공했습니다. '영원한 1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축구가 입증한 셈입니다. 2등과 약자에 대한 시선을 좀 더 긍정적으로 바라보며 그들이 1등에 올라서기까지 아낌없는 박수를 보낸다면 훈훈한 감동의 쓰나미를 느낄 수 있지 않을까요.

월드컵, '강자들의 전쟁'보다 이변이 더 기대된다

지구촌 축구 대제전으로 꼽히는 남아공 월드컵도 마찬가지 입니다. '1등을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을 월드컵의 기호에 맞게 적용하면 '강팀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 됩니다. 32개 본선 진출국 중에서 몇몇 국가들이 우승 후보로 꼽히기 때문에 강팀들만 여럿 존재합니다. 세계 최강 브라질과 천하무적 스페인의 강력한 우승 구도, 이탈리아의 월드컵 2연패 도전, '우승 청부사' 파비오 카펠로 감독을 영입한 잉글랜드의 우승 도전, '전차군단' 독일의 저력, '세계 최고의 선수' 리오넬 메시를 앞세운 아르헨티나의 막강 화력은 축구팬들의 열렬한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남아공 월드컵이 소위 '강자들의 전쟁'으로 주목을 받는 것입니다.

하지만 약팀들에 대한 관심은 강팀들에 비해 저조합니다. 맹목적인 관심을 강요하는것은 아니지만, '저 팀은 전력이 약해서 강팀에게 질게 뻔하지...', '뭐 저런 팀이 다 있어?'. '어짜피 16강 못갈텐데 관심 따위 가져야겠어?', '그래봤자 너넨 듣보잡' 같은 생각은 씁쓸합니다. 시험에서 항상 1등하는 학생을 극진하게 챙기는 선생님이 1등을 위해 노력하는 2등 학생을 업신 여기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마인드입니다. 2등의 노력이 누군가의 부정적 시각에 짓눌려 헛수고로 돌아가는 것은 반갑지 않으며 시스템 생태계의 퀄리티 약화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약팀이 강팀을 제압하는 이변의 짜릿함이 '강자들의 전쟁'보다 즐거운 경우가 많습니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1등이 항상 최고를 지키는 것은 지루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약팀의 이변이 반가울 때가 있는 것이죠.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8강 진출로 검은 돌풍을 일으킨 카메룬, 1994년 미국 월드컵 부터 2002년 한일 월드컵에 이르기까지 강팀을 제압하는 이변 끝에 4강 신화를 이룩했던 불가리아-크로아티아-한국은 우승국 못지않은 엄청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습니다.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는 우크라이나가 월드컵에 첫 출전하여 8강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그리고 남아공 월드컵에서는 지구촌 축구팬들을 깜짝 놀래킬 이변이 분명히 벌어질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 것 처럼, 월드컵에서 항상 이변이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유로 대회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리스는 유로 2004에서 철저한 약팀으로 주목받았으나 강팀을 모조리 제압한 끝에 우승컵을 들어올렸고, 유로 2008에서는 터키와 러시아가 4강에 진출해 강팀들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습니다. 축구는 의외성이 많은 종목으로서, 개인의 힘이 안되면 팀원끼리의 단결된 힘으로 강팀을 제압할 수 있는 특성이 있어 이변이 잦을 수 밖에 없습니다. 90분 단판승부로 치러지는 월드컵에서 이변이 속출할 수 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무엇보다 북한의 이변에 관심이 집중됩니다. 북한은 1996년 잉글랜드 월드컵 이후 44년 만에 본선 무대를 밟은 팀으로서 우리들이 약팀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브라질-포르투갈-코트디부아르 같은 막강 화력을 과시하는 팀들과 같은 G조에 속했기 때문에 대량 실점 패배가 우려되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북한은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박두익의 골로 이탈리아를 제압하며 8강 돌풍을 일으켰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들이 44년 만에 지구촌 축구계에 충격을 던져줄 이변을 연출하면 남아공 월드컵에 대한 열기가 뜨거워질 것은 분명합니다.

5백으로 짜인 북한의 밀집수비가 호비뉴-호날두-드록바 같은 세계 최정상급 공격수들의 힘을 빼놓는 것, 안영학이 카카 봉쇄에 성공해 북한판 김남일로 조명받는 것, 정대세가 남미판 빗장수비로 꼽히는 브라질의 골망을 흔들며 인민 루니의 저력을 과시하는 장면은 북한이 브라질-포르투갈-코트디부아르에게 일방적으로 패하는 것보다 더 재미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G조는 북한의 이변으로 서로 물고 늘리는 16강 진출 경쟁을 펼쳐 지구촌 축구팬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것입니다. 파브레가스가 이청용에게 머리를 스다듬기 이전에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우는 사진이 국내 축구팬들에게 큰 화제를 몰고왔듯, 호날두가 정대세에게 다가가 엄지 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실력을 인정하면 경기를 보는 우리들의 마음이 흐뭇하지 않을까요.

북한의 이변만 기대되는 것이 아닙니다. 개최국 남아공이 월드컵 16강에 진출할 클래스가 아니라는 사실은 웬만한 축구팬들도 알고 있습니다. 볶음 머리로 유명한 스티븐 피에나르(에버턴)을 모르는 축구팬들도 부지기수입니다. 그런 남아공은 월드컵 우승 후보 프랑스, 최근 4회 연속 월드컵 16강에 올랐던 멕시코, 남미의 전통강호 우루과이와 같은 A조에 속해 험난한 행보를 치러야 합니다. 역대 개최국이 월드컵에서 2라운드 진출의 성적을 올렸는데, 개최국 징크스가 이번 월드컵에서 적용되면 남아공은 16강에 진출하는 이변을 일으킵니다. 프랑스-멕시코-우루과이 중에서 누군가는 남아공의 희생양이 될 것입니다.

C조에는 그동안 월드컵과 인연이 적었던 알제리-슬로베니아가 속했습니다. 잉글랜드-미국에 밀려 16강에서 탈락할 것이라는 여론의 반응이 팽배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알제리의 전력은 월드컵 최하위권이지만 선수들의 투쟁심이 강한데다 이번 대회가 아프리카에서 열리는 특성까지 감안하면 이변을 일으킬 가능성이 적지 않습니다. 슬로베니아는 약팀 답지 않게 패스 게임을 할 수 있는 장점이 있으며 볼 점유율 확보에 주력하는 팀 컬러를 지녔습니다. 월드컵 본선에서 강팀보다 더 많이 움직이고 집중력을 잃지 않는다면 잉글랜드-미국전에서 선전할지 모릅니다.
 
H조의 온두라스는 월드컵 본선 출전 경력이 1982년 스페인 월드컵(18위)에 불과하며 28년 만에 본선에 올랐습니다. 스페인-칠레-스위스 같은 강호 및 다크호스와 같은 조에 속했기 때문에 이들의 승점 자판기 대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온두라스는 윌슨 팔라시오스(토트넘) 마이노르 피게로아(위건) 카를로스 파본(레알 에스파냐) 다비드 수아조(제노아) 같은 유럽 빅 리그에서 검증된 자원들이 속한 팀입니다. 빠른 공수 전환과 탄탄한 조직력을 강점으로 삼고 있어 만만히 바라볼 팀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번 대회 최약체로 꼽히는 뉴질랜드의 이변은 월드컵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지 모릅니다. 정식 프로리그가 아닌 세미 프로리그가 출범한지 6년 밖에 되지 않은데다 모든 선수들이 월드컵 경험이 없으며 특출난 스타 플레이어도 없습니다. 그래서 공격력, 수비력, 개인 능력, 조직력, 국제경기 경험에 이르기까지 F조에 속한 이탈리아-파라과이-슬로바키아보다 나은것이 없습니다. 이탈리아가 월드컵 2연패를 꿈꾸고, 파라과이는 남미 예선 3위 팀, 슬로바키아는 세리에A 최고의 플레이메이커 마렉 함식(나폴리)이 속한 팀이기 때문에 뉴질랜드의 일방적인 열세가 예상됩니다.

하지만 뉴질랜드가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이탈리아를 제압한 북한의 이변을 44년 만에 재현하고, 파라과이-슬로바키아와의 대등한 접전 끝에 16강 진출에 성공하면 그 자체만으로 세계를 깜짝 놀래킬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강팀들의 선전 여부를 주목하겠지만, 뉴질랜드를 비롯한 약팀들은 강팀 제압에 만전을 기울일 것이며 철저한 준비를 하고 본선에 나설 것입니다. 강자들의 전쟁도 좋지만 약팀의 이변까지 어우러지면 남아공 월드컵을 향한 지구촌의 열기는 어느 때보다 뜨거워질 것입니다. 이번 남아공 월드컵을 통해 '강팀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 무너지기를 바라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