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어도 2000년대 중반까지는 신태용을 'K리그 최고의 선수'라 말할 수 있었습니다. 신태용이 K리그에서 거둔 업적이 다른 누구보다 화려했기 때문이죠. 성남의 정규리그 3연패를 2번이나 이끈데다 국내외 대회에서 많은 우승컵을 거머쥐었고 무수한 개인상 수상에 이르기까지 K리그에서 가장 독보적인 커리어를 쌓았습니다.
하지만 신태용이 K리그를 떠난(2009년 성남 감독으로 복귀) 2005년 이후에는 'K리그 최고의 선수'라는 타이틀로 주목받을 만한 적임자가 뚜렷하지 못했습니다. K리그에서 외국인 선수들의 비중이 커진데다 유능한 국내파들의 해외 진출이 잦아졌기 때문입니다. 이천수-김두현-따바레즈-이운재-이동국 같은 최근 5년 간 정규리그 MVP를 수상했던 선수를 거론할 수 있지만, 그것은 시즌 최고의 활약일 뿐 오랫동안 K리그에서 최고의 자리를 지킨 선수를 K리그 최고의 선수라 말할 수 있습니다.
김병지, 이름 그 자체만으로 K리그 최고의 선수
현존하는 K리그 최고의 선수는 김병지(40, 경남)라는 생각입니다. 1990년대와 2000년대 K리그 최고의 골키퍼로 자리매김했고 2010년대로 넘어온 2010년에도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올 시즌 K리그 주간 베스트11 골키퍼 부문에 가장 많이 선정된 선수(3회)로서 2회 획득한 김영광을 압도하고 있습니다. 올 시즌 8경기에서 7실점을 기록해 경남 K리그 2위 돌풍의 주역으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경남 수비진에 중심을 잡아줄 노련한 선수가 없음을 상기하면, 김병지가 올 시즌 무수한 선방을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김병지의 경이적인 활약이 놀라운 이유는 불혹을 넘은 지금도 전성기를 보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김병지는 지난 15일 자신의 미니홈피에 "언제부터가 전성기였는가 묻는다면 37세(한국식 나이, 만으로 36세) 부터라고 얘기해주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36세였던 2006년 40경기 34실점, 37세였던 2007년 38경기 25실점, 38세였던 2008년 허리 부상 여파로 6경기 7실점, 39세였던 2009년 29경기 30실점, 그리고 올해 8경기 7실점을 기록해 5년 동안 121경기 103실점이라는 0점대 실점률(1경기당 0.85실점)을 올렸습니다. 이것은 웬만한 젊은 선수들이 달성하기 힘든 기록입니다.
한국의 구기 종목 스타들은 30대 중반이 되면 은퇴 기로에 처하는 현실에 놓였습니다. 프로농구와 프로배구 최고의 스타였던 이상민-신진식이 구단의 은퇴 종용을 받아 끝내 은퇴를 택했던 사례처럼, 나이가 들면 외부에서 은퇴 유혹을 받는 한국의 스포츠 환경은 씁쓸한 구석이 있습니다. K리그 최고의 선수였던 신태용은 2004년 슬럼프에 빠지자 성남과의 재계약에 실패해 현역 은퇴식 없이 호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같은 팀의 김도훈이 2006년 초 은퇴식을 치렀던 것을 상기하면, 성남은 K리그 최고 레전드에 대한 예우를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감독으로 영입하기 전까지)
사실, 김병지에게도 위기가 있었습니다. 2008년 1월 31일 A매치 칠레전 경기 도중 허리를 다치면서 장기간 재활 및 회복에 몰두했습니다. 하지만 김병지의 소속팀이었던 서울은 젊은 골키퍼였던 김호준을 키울려는 목적이 뚜렷했고, 그 과정에서 김병지는 세놀 귀네슈 감독과의 갈등으로 소속팀에서의 입지를 잃고 이듬해 경남으로 이적했습니다. 김병지를 내친 서울은 지난해 김호준의 불안한 선방 및 리더 부재로 어려움을 겪은 끝에 시즌 막판 고비를 넘지 못하고 6강에서 탈락했습니다. 그래서 김호준을 제주로 보내고 김용대를 성남에서 영입해 김병지 방출의 댓가를 혹독히 치렀습니다.
만약 김병지가 2008년 서울에서의 재계약에 실패해 은퇴를 택했다면 K리그는 레전드를 보내는 슬픈 현실에 처했을뿐만 아니라 경남의 돌풍이 없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김병지는 자신의 기량이 죽지 않았음을 보여주기 위해 2009년 경남으로 이적해 '젊은 선수보다 뛰어난' 위기 관리 대처 및 빠른 예측에 의한 선방을 바탕으로 K리그 최고 골키퍼의 자존심을 회복했습니다. 지난해 11월 전북과의 최종전에서는 역대 최초 K리그 통산 500경기 출전 기록을 세우며 K리그의 기념비적인 역사를 세웠습니다.
어느 프로 스포츠 종목이든, 40세 이상의 선수가 최고의 자리를 지키는 것은 드문 일 입니다. 30대가 되면 전반적인 운동능력 및 순발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노장이 영건보다 불리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김병지는 20대 선수 못지 않은 순발력 및 꾸준히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며 골대를 책임졌습니다. 그리고 10년 넘게 프로에서 쌓았던 위기관리 대처 경험에 철저한 자기관리까지 더해지면서 젊은 시절보다 안정적인 선방 능력을 과시했습니다. 김병지가 37세부터 전성기였다고 말하는 이유가 이 때문입니다.
물론 김병지를 K리그 최고의 선수라고 부르기에는 과소 평가 되는 부분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는 우승 경력이 적다는 것이며 둘째는 골키퍼이기 때문입니다. 김병지는 1996년 울산의 전기리그 및 정규리그 우승, 2004년 포항의 전기리그 우승, 2006년 서울의 하우젠컵 우승 이외에는 신태용에 비해 우승 커리어가 부족합니다. 그리고 골키퍼라는 자리는 공격수-공격 성향 미드필더들에 비해 대중들의 스포트라이트를 적게 받는 자리이자 99번 잘해도 1번 실수하면 욕을 먹는 포지션이기 때문에 충분한 저평가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축구는 11명이 뛰는 스포츠이자 골키퍼가 중요한 임무를 맡고 있습니다. 10명의 필드 플레이어 실력이 출중해도 골키퍼의 실력이 부족하면 좋은 성적을 달성하기 힘듭니다. 올 시즌 초반 벤 포스터의 불안한 선방으로 고민에 빠졌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대표적 예 입니다. 반면 골키퍼의 실력은 좋은데 필드 플레이어의 경기력이 좋지 않은 팀은 이기기가 힘듭니다. 김병지가 존재했던 2007년의 서울이 그랬고 수많은 무승부를 양산했습니다. 당시 서울 전력에서 김병지가 없었다면 무승부가 아닌 패배 횟수가 많았을지 모르며 일찌감치 6강 진출이 좌절되었을 겁니다. 김병지가 골키퍼라는 이유로 K리그 최고의 선수로 부르는데 있어 저평가 되는 것은 부적절합니다.
무엇보다 김병지를 K리그 최고의 선수라 말할 수 있는 이유는 거의 20년 동안 K리그 축구팬들의 꾸준한 인기를 얻으며 리그 흥행에 없어선 안 될 스타로 자리매김했기 때문입니다. 최근 대표팀 골키퍼 논란에서 '김병지를 발탁하라'는 여론의 분위기가 고조된 이유는 김병지에 대한 대중적인 인기가 예전이나 지금이나 높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실력이 출중한 선수라도 대중적인 인기를 얻지 못했던 국내 외 몇몇 스타 선수의 사례와는 달리, 항상 최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면서 팬들을 위해 배려하는 그의 마음씨가 많은 사람들에게 '호감'을 샀기 때문입니다.
김병지는 울산 시절부터 꽁지머리 및 독특한 헤어스타일과 유니폼으로 팬들의 시선을 끌었고, 지난해 11월 K리그 500경기 출전 기록을 세울때는 등번호 500번 유니폼을 착용하고 경기를 펼쳤습니다. 팬서비스도 팬서비스지만, 축구에서 보기 드문 명장면으로 팬들의 감탄을 '오랫동안' 자아냈던 일화는 여전히 잊혀지지 않습니다. 1998년 플레이오프 2차전 포항전에서 경기 종료 직전 상대팀 문전에 직접 다가가 헤딩골을 넣으며 울산의 승리를 이끌었습니다. 고종수-이동국-안정환 같은 얼짱 축구 선수들의 인기로 주목을 끌던 K리그가 김병지의 골에 기폭제를 얻어 르네상스기를 보냈던 이유죠.
그런 김병지는 지난 15일 자신의 미니홈피에서 "이젠 매경기 써 내리는 나의 기록들보다 팬들의 가슴에 영원히 기억될 좋은 선수이고 싶다"는 코멘트를 남기고 글을 마쳤습니다. 프로 선수는 팬들의 지지와 관심을 받아 선수로서의 가치를 높이는 직업이기 때문에, 팬들의 오랜 사랑을 받으며 꾸준히 최선을 다하겠다는 마음을 내비쳤습니다. 그래서 항상 팬들을 위해 배려하는 그의 마음씨, 자신의 마음속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불우 이웃 돕기 및 꾸준한 기부 활동은 많은 사람들에게 정평이 났습니다. 팬들과 함께 영원히 소통하고 싶은 김병지는 앞으로도 우리들의 가슴속에 'K리그 최고의 선수'로 남아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