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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구자철 EPL 진출을 반대하는 이유

 

1. 최근 두 명의 한국인 축구 선수가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팀들의 영입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지난해 U-20 월드컵에서 한국 대표팀의 주장으로 활약했던 구자철(21, 제주)과 K리그에서 날카로운 킥력을 뽐냈던 염기훈(27, 울산)이 바로 그들입니다. 구자철은 블랙번으로부터 입단 테스트 제의를 받았으며 영입이 성사될 경우 제주가 대승적인 차원에서 보내기로 했습니다. 염기훈은 버밍엄 시티로 부터 1년 6개월 임대 제의를 받았으며 울산이 긍정적으로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구자철과 염기훈에 대한 영입 관심은 한국인 선수의 능력을 프리미어리그가 인정했음을 의미합니다. 박지성과 이영표에 이어 이청용까지 프리미어리그에서 우수한 활약을 펼치면서 현지 팀들이 K리그의 전도유망한 선수에게 관심을 가진 것이죠. 특히 일본 J리그 선수가 아닌 K리그 선수들을 눈여겨 보는 것은 유럽에서 성공할 수 있는 K리그 선수들이 즐비함을 의미합니다. 두 선수가 프리미어리그 팀들의 러브콜을 받는 것은 K리그에게도 반가운 일입니다.

2. 하지만 염기훈의 프리미어리그 진출은 현실적이지 못합니다. 올해 27세의 염기훈은 군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으며 올해 연말 상무에 입대해야 합니다. 상무가 만 27세 이하의 선수들을 뽑는 기준이 있어, 염기훈이 상무에 입대할 수 있는 기회는 올해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염기훈이 버밍엄 시티 임대를 원한다면 상무행을 포기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선수 본인이 상무가 아닌 경찰청 입대를 염두하고 있는지는 의문이지만요.(참고로, 김동진과 장학영이 27세 나이 제한에 걸려 상무 못갑니다.)

또한 염기훈에게 임대 제안을 한 버밍엄 시티는 제임스 맥파든이라는 왼쪽 윙어가 있습니다. 올 시즌 프리미어리그 19경기에 선발 출전하여 2골 1도움을 기록했는데 빠른 스피드와 드리블링을 앞세워 측면을 파고드는 돌격형 윙어이며 올 시즌 좋은 폼을 발휘했습니다. 버밍엄 시티가 맥파든을 보유했음에도 염기훈을 임대로 쓰겠다는 것은 마케팅 차원일 가능성이 큽니다. 얼마전 버밍엄 시티가 김형일(포항)에 대한 영입 관심을 가졌으나 그 이후 소식이 들리지 못했던 것 처럼, 염기훈의 버밍엄 시티 임대 작업이 앞으로 순탄할지는 미지수입니다.

3. 반면 구자철은 염기훈에 비해 군 문제에 대한 제약이 덜합니다. 국가유공자 후손이기 때문에 6개월만 복무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군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선수들이 거의 2년 동안 병역 의무를 짊어져야 하는 현실을 떠올리면 6개월 복무는 유럽 진출에 커다란 걸림돌이 되지 않습니다.

구자철은 K리그와 청소년 대표팀, 최근에는 허정무호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수비형 미드필더입니다. 자로잰듯한 패싱력과 안정된 볼 키핑, 절묘한 위치선정, 중원에서의 빠른 순발력으로 출중한 기량을 발휘했던 선수이며 사비 알론소(레알 마드리드)처럼 중원에서 경기를 조율하는 성향입니다. 지난해 U-20 월드컵에서 한국의 8강 진출을 이끌며 블랙번의 영입 관심을 받았던 저력이라면 충분히 프리미어리그에 도전해 볼 만 합니다.

'구자철보다 1살 많은' 이청용이 프리미어리그에 진출한지 얼마되지 않아 볼튼의 에이스로 떠오를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공격 재능을 유감없이 보여줬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이청용은 FC서울 시절의 공격력을 다 보여주지 못했다며 볼튼에서 지금보다 더 좋은 활약 펼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내비치고 있습니다. 프리미어리그에서 성공하겠다는 의지가 충만했고 무엇보다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몸싸움과 체력 부족으로 볼튼에서 실패할 것이다'는 국내 여론의 우려섞인 전망을 실력으로 뒤엎었습니다. 구자철도 이청용처럼 패기로 마음을 무장하면 프리미어리그에서 꿈을 이룰 수 있을 것 처럼 보입니다.

4. 하지만 프리미어리그에서의 성공은 패기 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프리미어리그는 엄연히 세계 최고의 축구 리그이고 세계 정상급 기량을 가진 지구촌 축구 인재들이 즐비한 곳입니다. 패기와 정신력 이전에 실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프리미어리그에서 실패의 쓴 맛을 볼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낯선 외국이기 때문에 언어-음식-날씨-문화에 대한 적응을 해야하고 프리미어리그 특유의 빠른 템포를 견뎌낼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아무리 실력이 좋은 선수라도 적응 실패로 프리미어리그를 떠난 선수들이 많다는 것을 유럽 진출을 꿈꾸는 한국인 선수들이 인지해야 합니다.

공교롭게도 프리미어리그에서 두각을 떨친 한국인 선수들의 공통점은 포지션이 측면입니다. 박지성-이영표-이청용은 측면 옵션으로서 출중한 기동력을 발휘했고 설기현은 풀럼에서 실패했으나 레딩 시절에는 양질의 패스를 앞세운 정확한 볼 배급으로 재미를 봤습니다. 반면에 중앙을 맡은 선수들은 모두 실패했습니다. 중앙 공격수 이동국, 중앙 미드필더 김두현과 조원희가 바로 그들입니다.

그중 김두현은 2008/09시즌 초반에 왼쪽 윙어로 뛰었으나 이전 시즌에 중앙을 맡았고, 부상 이후에도 중앙 미드필더로 뛰었기 때문에 측면이 아닌 중앙 옵션으로 분류해야 할 것입니다. 김두현의 웨스트 브롬위치 실패 원인은 잦은 포지션 전환과 부상 후유증입니다. 특히 중앙과 측면을 번갈아 맡았음에도 어느 한 곳에서 최적의 활약을 펼치지 못한 것은 프리미어리그 스타일에 적응하지 못했음을 의미합니다.

프리미어리그는 상대팀 공격 옵션에게 가하는 압박이 심하기로 유명한 곳입니다. 미드필더와 수비라인의 간격이 짧고 촘촘해 상대팀의 공격형 미드필더가 많은 견제를 받을 수 밖에 없으며, 중앙 미드필더 혹은 수비형 미드필더들에게 있어 탄탄한 압박과 거친 수비력이 강조됩니다. 중앙에서 플레이메이커 역할을 맡는 사미르 나스리(아스날) 루카 모드리치, 니코 크란차르(이상 토트넘) 요시 베나윤(리버풀)이 프리미어리그 진출 이후 측면에 기용되고 있는 이유가 이 때문입니다. 이들과 같은 플레이메이커인 김두현이 측면에 배치되었던 이유도 마찬가지죠. 측면이 중앙보다 압박이 느슨하고 전방으로 질주할 수 있는 공간이 넓기 때문입니다.

5. 만약 구자철이 블랙번 입단 테스트에 합격하여 프리미어리그에 입성하면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빠른 템포와 쉴틈없는 공수전환, 상대 중앙 옵션의 거친 수비와 압박을 느끼게 됩니다. K리그와 프리미어리그의 레벨 차이가 엄연히 존재함을 떠올리면 적응 과정을 밟는 것이 불가피합니다. 이청용도 프리미어리그 진출 초기에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공수전환 때문에 체력적인 한계를 겪어 풀타임 출전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지금은 시즌 초반보다 좋아졌지만) 구자철이 블랙번에서 성공적인 활약을 펼치려면 적응 성공에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하지만 프리미어리그에서 중앙에 기용되거나 측면에 배치되는 것은 느낌이 서로 다릅니다. 중앙 옵션인 김두현이 프리미어리그에서 측면에 기용된 것은 중원에서 상대 압박에 대처하여 능수능란한 공격력을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측면에서 중앙으로 재배치되어 기대 이하의 경기를 펼쳤던 것이 이를 뒷받침하죠. 반면 이청용은 측면에서 넓은 공간을 헤집고 다니며 특유의 센스넘치는 기교와 정확한 패싱력을 뽐냈습니다. 그런 이청용도 지난해 10월 첼시전에서는 공격형 미드필더로 출전했으나 상대 압박에 막혀 좀처럼 최전방에 전진할 수 없었고 볼 터치도 평소보다 부족했습니다. 김두현과 더불어 프리미어리그의 중앙이 안맞았습니다.

구자철이 있어야 할 곳은 중앙이며 지금까지 중앙에서 최상의 경기력을 발휘했습니다. 제주에서 입단 테스트를 거쳐 프리미어리그에 진출하기에는 김두현과 이청용의 전례처럼 중앙에서의 강도높은 압박을 견뎌내야 합니다. 그러나 프리미어리그의 중앙 옵션으로서 꾸준한 활약을 펼치기에는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능력이 검증되지 못했습니다. 입단 테스트를 통해 검증 절차를 밟겠지만, 프리미어리그에서 성공할지는 의문이 클 수 밖에 없습니다. 더욱이 입단 테스트에 합격했다고 해서 꾸준한 선발 출전이 보장되는 것은 아닙니다.

6. 프리미어리그에서 실패한 케이스로 분류되는 이동국-김두현-조원희에게 중앙 옵션에 이은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세 선수 모두 유럽 스몰리그를 거치지 않고 K리그에서 잉글랜드 무대에 바로 입성했습니다. 물론 김두현은 웨스트 브롬위치가 챔피언십리그(잉글랜드 2부리그)에 있을 당시에 잉글랜드 무대를 밟았지만 유럽 스몰리그에서 뛰지 않았습니다. 그런 구자철이 블랙번 진출에 성공하면 세 명의 선수처럼 유럽 스몰리그를 거치지 않습니다.

만약 구자철이 유럽 스몰리그에서 꾸준한 경기 감각을 기르며 중앙에서 버틸 수 있는 내구성을 키운다면 프리미어리그에서의 실패 가능성이 줄어듭니다. 하지만 K리그에서 프리미어리그에 바로 진출하는 것은 중앙 옵션으로서 실패할 위험성이 큽니다. 물론 이청용도 유럽 스몰리그를 거치지 않고 프리미어리그에서 성공했으나 그는 중앙이 아닌 측면 옵션입니다. 20대 초반의 황금같은 시기에 프리미어리그에서 실패와 고난의 시기를 보내기에는 무궁한 잠재력이 아쉽기만 합니다.

더욱이 구자철은 남아공 월드컵 최종 엔트리 포함 및 본선 출전을 위해 허정무호에서 구슬땀을 흘리고 있습니다. 다른 경쟁 자원보다 한발짝 앞서 나가려면 소속팀에서의 꾸준한 경기 출전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동안 대표팀에서 검증된 활약을 펼칠 기회가 적었던 만큼, 1월 이적시장을 통해 블랙번 입단 테스트 절차를 밟는 것은 타이밍이 좋지 않습니다. 여기에 프리미어리그 중앙 옵션의 특수성까지 더해지면, 구자철의 블랙번 진출은 위험부담이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현 상황에서, 구자철의 프리미어리그 진출을 반대할 수 밖에 없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