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독일 축구를 빛낸 최고의 선수가 미하엘 발라크(34, 전 첼시)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독일이 2002년 한일 월드컵 준우승, 2006년 독일 월드컵 3위, 유로 2008 준우승의 쾌거를 달성하기까지 발라크의 공헌도가 막중했기 때문입니다. 전차군단은 개인기를 앞세운 화려한 컨셉과 거리감이 있었음에도 메이져 대회에서 선전했던 것은 발라크를 중심으로 짜여진 미드필더진의 유기적인 콤비플레이가 실전에서 기계처럼 하나된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입니다.

비록 발라크는 메이져 대회 우승 경력이 없었지만 세계 최정상급 미드필더임엔 분명합니다. 홀딩맨, 앵커맨, 공격형 미드필더 역할까지 자신의 임무를 묵묵히 소화했고 공수 양면에 걸친 모든 능력이 골고루 출중했습니다. 다부진 피지컬을 앞세운 강력한 몸싸움과 세밀한 태클, 날카로운 슈팅 및 패싱력, 과감한 드리블 돌파에 이은 슈팅에 경기를 지배하는 아우라를 자랑했던 만능형 미드필더 였습니다. 그리고 팀이 승리를 필요로 하는 순간에 결정적인 공격 기회를 만들거나 직접 골을 넣는 해결사적인 기질까지 발휘했습니다.

특히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는 독일이 최악의 경기를 펼친다는 외부의 지적을 훌륭하게 이겨냈습니다. 8강 미국전과 4강 한국전에서 결승골을 넣으며 독일 준우승의 디딤돌 역할을 마련했고 그 시절이 오늘날의 발라크를 있게 한 계기가 됐습니다. 하지만 한국전에서 이천수에게 거친 파울을 가하여 옐로우 카드를 받아 경고가 누적되자 결승 브라질전에 결장한 것은 선수 본인에게 아쉬움이 컸을 것입니다. 결과론적인 관점이지만, 만약 브라질전에 출전했다면 결승전 경기 양상은 기존 사실과 달랐을 것이며 어쩌면 월드컵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을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흔히 발라크하면 '준우승 징크스'로 유명합니다. 유독 준우승 경험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13번의 준우승을 경험했으며 특히 2001/02시즌과 2007/08시즌에는 각각 4번, 5번의 준우승을 기록했습니다. 2001/02시즌에는 레버쿠젠에서 분데스리가-DFB 포칼-UEFA 챔피언스리그 준우승을 비롯 한일 월드컵 준우승, 2007/08시즌에는 첼시에서 프리미어리그-커뮤니티 실드-칼링컵-UEFA 챔피언스리그 준우승에 유로 2008까지 준우승 커리어를 쌓았습니다. 세계 톱클래스 선수들도 준우승 커리어가 있지만 2001/02시즌, 2007/08시즌의 잦은 준우승은 팬들에게 강한 뇌리를 심어줬습니다.

물론 발라크는 우승 경험이 있습니다. 4번의 분데스리가 우승을 비롯 바이에른 뮌헨 시절에는 3번의 더블 우승의 기쁨을 맛봤습니다. 첼시에서는 두 번의 더블 우승 주역으로 활약했고 올 시즌에는 프리미어리그 우승의 숨은 공신으로 활약했습니다. 하지만 축구팬 입장에서는 우승 보다는 준우승 커리어에 대한 존재감이 강할 수 밖에 없었고 특히 월드컵-유로 대회-UEFA 챔피언스리그 같은 메이져 대회 준우승 경력 때문에 '2인자'라는 꼬리표가 붙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습니다. 물론 독일 축구 내에서는 1인자였지만 세계적인 관점에서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발라크에게 2인자 이미지가 따라붙는 이유는 '축구 황제' 지네딘 지단과 동시대에 활약했던 선수였기 때문입니다. 발라크는 2001/02시즌 레버쿠젠의 챔피언스리그 결승 진출을 이끌었으나 지단을 앞세운 레알 마드리드에 밀려 우승을 달성하지 못했습니다. 특히 지단은 결승전에서 환상적인 발리슛으로 레버쿠젠의 골망을 흔들며 세계 축구팬들의 뜨거운 환호를 받았습니다. 비록 2002년 한일 월드컵 본선 32강에서 탈락했으나 1998년 프랑스 월드컵-유로 2000 우승의 화려한 커리어가 있었기에 여전히 세계 최정상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지단보다 4세가 더 적은 발라크가 핸디캡을 안고 갈 수 밖에 없었던 이유입니다.

그래서 발라크에게는 2010년 남아공 월드컵이 2인자 인생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절호의 계기로 작용했습니다. 지단이 독일 월드컵을 끝으로 은퇴한데다 독일이 월드컵 유럽 예선에서 전력적인 어려움없이 무난하게 본선 진출 티겟을 따냈기 때문에 월드컵 우승에 도전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독일이 전통적으로 월드컵 토너먼트에서 강인한 집중력과 승리욕에 불타오르는 기질이 넘쳐흘렀고, 발라크가 그동안 꾸준히 좋은 활약을 펼쳤던 선수였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월드컵 행보를 기대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발라크는 지난달 16일 잉글리시 FA컵 결승전 포츠머스전 경기 도중 케빈 프린스 보아텡의 거친 태클에 의해 오른쪽 발목 인대를 다치고 말았습니다. 회복 기간만 최소 8주 걸린다는 진단을 받은 끝에 결국 월드컵 출전이 좌절됐습니다. 2인자의 한을 풀 수 있는 기회가 저절로 날라간 셈입니다. 만약 독일의 세계 제패를 이끌었다면 뮐러-베켄바우어-마테우스 같은 월드컵 우승 커리어가 있는 독일 축구의 영웅들과 견줄 수 있는 위치에 올랐을 것이지만 그 시나리오가 결국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어쩌면 발라크의 독일 대표팀 커리어는 불의의 부상 때문에 이미 끝났을지 모릅니다. 올해 34세의 노장이기 때문에 유로 2012,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 출전하기에는 체력적인 부침에 시달릴 수 밖에 없습니다. 독일 축구 입장에서도 남아공 월드컵 이후에는 메수트 외질, 마르코 마린 같은 젊고 싱상한 미드필더들을 위주로 세대교체를 단행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발라크가 희생양 될 수 있습니다. 올 시즌 첼시에서 기동력 및 체력 저하 조짐을 보였던 만큼, 남아공 월드컵 이후 독일 대표팀에서 입지를 지키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부상만 당하지 않았다면 월드컵 우승 의욕을 키웠겠지만 현실은 발라크의 마음을 외면했습니다.

불의의 부상 여운이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첼시로부터 방출 통보를 받은 것은 많은 축구팬들을 안타깝게 했습니다. 시즌 중반까지 4-4-2의 다이아몬드 체제에서 기동력에 약점을 드러내면서 상대팀에게 공격 기회를 허용하는 아쉬움이 있는데다 올해 34세의 나이가 첼시의 세대교체 의지 때문에 걸림돌로 작용했습니다. 하지만 시즌 후반 존 오비 미켈의 부상으로 홀딩맨으로 전환하면서 묵묵히 궂은 역할에 임하여 공격 옵션들의 수비 부담을 줄여 팀의 폭발적 공격 축구를 유도했던 살림꾼 노릇이라면 다음 시즌에도 충분히 통했을 것입니다. 만약 발라크가 없었다면 첼시는 에시엔-미켈 부상 공백을 메우지 못하고 프리미어리그 우승 달성에 실패했을지 모릅니다.

무엇보다 첼시 이적 후 첫 시즌이었던 2006/07시즌 프랭크 램퍼드와의 공존 실패가 아쉬웠습니다. 당시 첼시는 발라크-램퍼드가 드록바-셉첸코 투톱의 뒷쪽을 보조하는 4-2-2-2 포메이션을 구사했는데 수 차례의 패스미스 및 연계 플레이 불안으로 팀 공격에 임펙트를 심어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셉첸코와 더불어 2006/07시즌 최악의 영입 리스트에 포함되는 불명예를 비롯 방출설에 시달리는 어려움에 직면했습니다. 그 이후 절치부심 끝에 미드필더진에 없어선 안 될 옵션으로 꼽혔으나 램퍼드에 비해 수비적인 비중이 많았습니다. 첼시에서의 성공을 위해 자신의 스타일을 바꿨지만 궂은 역할로 1인자에 도약하기에는 무리함이 있습니다.

발라크는 훗날 한 시대를 풍미했던 미드필더로 회자 될 것입니다. 하지만 준우승 징크스에 2인자 꼬리표가 달라붙은데다 남아공 월드컵을 앞두고 부상으로 출전이 좌절되는 아픔을 겪으면서 '비운의 스타'로 조명받게 됐습니다. 부상만 아니었다면 그토록 원했던 메이져 대회 우승컵을 따내며 1인자로 도약할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할 수 있었지만 예상치 못한 불운에 좌절하고 말았습니다. '만년 2인자도 1인자가 될 수 있다'는 메시지와 희망을 우리들에게 전해주지 못한 발라크의 비운이 안타깝게 느껴집니다.

Posted by 나이스블루

 

2010 남아공 월드컵 우승에 도전장을 내밀었던 독일 축구 대표팀이 치명적인 악재에 직면했습니다. 대표팀의 주장이자 정신적 지주인 미하엘 발라크(34, 첼시)가 부상으로 월드컵에 불참하게 됐습니다.

발라크는 지난 16일 잉글리시 FA컵 결승전 포츠머스전 경기 도중 케빈 프린스 보아텡의 거친 태클에 오른쪽 발목 인대를 다치면서 회복 기간만 최소 8주 이상 걸린다고 합니다. 남아공 월드컵이 불과 20여일 앞으로 남았기 때문에 월드컵 출전은 물거품입니다. 특히 보아텡은 독일 청소년 대표팀 출신의 가나 국적 선수여서 독일 국민들의 거센 비난을 받을 것으로 보입니다.

무엇보다 발라크는 남아공 월드컵 우승이 간절했던 선수였습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독일이 답답한 경기를 펼친다는 외부의 비판 속에서도 8강 미국전, 4강 한국전 결승골로 조국의 결승 진출을 견인했으나 브라질에게 덜미를 잡혔습니다. 4년 뒤 자국에서 열린 독일 월드컵에서는 우승 의욕이 충만했으나 4강에서 이탈리아에게 패하여 3위에 만족했습니다. 그래서 남아공 월드컵에서 우승의 한을 풀며 베켄바우어-마테우스 같은 월드컵 우승 경력이 있는 독일 축구 레전드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나 끝내 부상 앞에 좌절했습니다.

발라크의 월드컵 불참은 독일에게 악재입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시절부터 지금까지 발라크의 패스를 시발점 삼아 공격을 전개했기 때문입니다. 발라크의 강점인 원터치 패스를 비롯 2대1 패스와 스루패스를 기반으로 짧게 주고 받는 콤비 플레이를 유도하는 경기력은 독일 대표팀의 오랜 주 전술 이었습니다. 비록 첼시에서 수비적인 비중이 늘어나면서 공격력이 예전보다 주춤한 아쉬움이 있지만 조율 능력에서는 무게감이 강했습니다. 그래서 독일은 발라크가 빠지면서 새로운 전술을 짜야하는 버거운 상황에 직면했습니다.

독일은 발라크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여러가지 방안을 모색할 것입니다. 발라크의 백업 멤버이자 중앙 미드필더인 지몬 롤페스(레버쿠젠) 토마스 히츨슈페르거(라치오)가 부상으로 예비 엔트리에서 제외되면서 중원이 허약해진 상황입니다. 그래서 측면 자원이 중앙으로 옮길 가능성이 커졌습니다. 그동안 좌우 날개로 활약했던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바이에른 뮌헨) 메수트 외질(브레멘)이 중앙으로 옮기고 루카스 포돌스키가 공격수에서 윙어로 내려갈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선수가 외질입니다. 외질은 올해 22세의 터키계 선수이며 팀 동료인 마르코 마린과 함께 독일 최고의 테크니션으로 꼽힙니다. 다이나믹한 드리블 돌파와 현란한 발재간을 주무기로 삼는 선수인데 전형적인 독일 축구 스타일과 다른 유형으로 꼽힐만큼 독일에서 열렬한 기대와 관심을 끌었습니다. 여기에 폭발적인 스피드를 앞세워 측면을 활발하게 질주하는 파괴력이 있어, 개인의 힘으로 직접 골을 넣을 수 있는 역량까지 갖추었습니다. 왼발잡이지만 좌우 측면을 모두 소화할 수 있다는 것이 또 다른 장점입니다.

그리고 외질은 발라크처럼 짧고 간결한 패스를 주고 받으며 유기적인 콤비 플레이를 엮어낼 수 있는 특징이 있습니다. 넓은 시야와 빠른 판단력을 앞세운 패싱력의 날카로움을 뽐냈던 터라 상대 수비의 허를 찌르는 결정적 공격 기회를 마련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중앙 미드필더까지 겸할 수 있었고 한때 독일이 4-2-3-1을 구사할 때는 공격형 미드필더를 맡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외질의 다재 다능함은 발라크가 중심이었던 독일의 전력을 외질-발라크의 공존 체제로 바꾸는 계기로 작용했습니다.

발라크 없이 남아공 월드컵에 참가하는 독일은 외질의 맹활약에 기대야 하는 상황입니다. 외질이 22세 선수인데다 국제적인 명성이 부족하기 때문에 과소평가를 받을 수 있지만, 선수 본인에게는 남아공 월드컵을 통해 자신의 이름을 세계에 널리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투박한 스타일이 넘치는 다른 독일 선수들과 달리 남미 선수를 보는 듯한 개인기 위주의 경기를 펼치기 때문에 많은 축구팬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이타와 이기적인 경기력을 경기 상황에 따라 조절할 수 있는 능숙함이 있어 무리한 욕심을 부리지 않는 스타일이 호감을 얻을 것으로 보입니다.

일부에서는 외질을 독일 축구의 단순한 유망주로 바라볼지 모릅니다. 하지만 외질은 지난해 6월 유럽 U-21 선수권 대회 결승 잉글랜드전에서 1골 2도움을 기록해 독일의 4-0 대승과 함께 대회 사상 첫 우승을 이끈 주역입니다. 지난 시즌 28경기에서 3골 12도움을 기록했고 올 시즌 31경기에서는 9골 12도움을 올리며 팀의 분데스리가 3위 진입 및 다음 시즌 UEFA 챔피언스리그 출전권 획득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특히 독일 축구 전문지 키커로 부터 분데스리가 전반기 최우수 선수에 선정되면서, 독일 축구를 대표하는 새로운 주역으로 거듭났습니다.

특히 외질은 올 시즌 분데스리가에서 득점력이 향상되면서 남아공 월드컵에서 독일의 승리를 위해 골을 터뜨릴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발라크가 독일 대표팀에서 꾸준히 골을 넣으며 공격의 구심점 역할을 톡톡히 해냈듯, 외질은 발라크의 강점인 골 생산에 눈을 뜨게 됐습니다. 남아공 월드컵에서는 발라크의 자리인 중앙 미드필더를 맡을지, 기존의 자리였던 측면을 맡을지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독일 대표팀의 공격 구심점은 발라크에서 외질로 바뀌었다는 점입니다. 과연 외질이 발라크가 이루지 못했던 월드컵 우승을 통해 세계적인 축구 스타로 거듭날지 주목됩니다.

 

Posted by 나이스블루

 

월드컵은 최고의 축구 스타를 가리는 지구촌 축구 대제전이다. 흔히 축구팬들에게 '축구 황제'로 일컬어지는 펠레-마라도나-호나우두-지단이 세계 축구 영웅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도 월드컵이 있었기 때문이다. 푸스카스-크루이프-베켄바우어-호마리우 같은 월드컵 최고의 스타들도 마찬가지. 하지만 이들에 가려진 2인자들도 1인자 못지 않은 축구 영웅로 꼽힌다. 무한도전의 박명수, 1박2일의 이수근과 이승기가 유재석-강호동의 2인자로 주목을 받듯, 우리들이 주목해야 할 월드컵 영웅의 2인자들이 있다.

1. 산드로 콕시스(1929년 9월 29일생, 1954년 월드컵 베스트 11, 국적 : 헝가리)
펠레가 1958년 스웨덴 월드컵을 통해 축구 황제로 떠오르기 이전까지, 세계 최고의 공격력을 발휘했던 존재는 '매직 마자르' 헝가리의 투톱인 푸스카스-콕시스였다. 푸스카스가 '최고의 골잡이', '왼발 마술사'의 찬사를 받아 A매치 85경기에서 84골을 넣었다면, 콕시스는 강력한 헤딩과 포스트플레이를 자랑하던 골잡이였다. 1954년 스위스 월드컵에서는 콕시스의 골 생산이 단연 돋보였다. 한국전 3골을 비롯 총 11골을 넣으며 득점왕에 등극했는데 푸스카스의 4골보다 거의 3배 이상 많았다. 그러나 스위스 월드컵 이후 레알 마드리드의 황금시대를 열었던 푸스카스의 화려한 명성에 가려 2인자의 인상이 짙어졌다.

2. 고든 뱅크스(1937년 12월 20일생, 1966년 월드컵 베스트 11, 국적 : 잉글랜드)
뱅크스는 조국에서 열린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삼사자 군단의 우승을 이끈 골키퍼다. 각각 골든볼(1위) 실버볼(2위)을 수상한 바비 찰튼, 바비 무어의 공헌에 밀린 감이 있지만, 그가 없었다면 잉글랜드의 우승이 힘들었지 모른다. 조별리그 3경기와 아르헨티나와의 8강전에서 무실점 선방을 펼쳤기 때문. 1970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펠레가 왼쪽 구석에서 날린 헤딩슛을 놀라운 반사 신경으로 선방했던 장면은 월드컵에서 가장 뛰어난 선방으로 일컬어진다.

3. 자이르지뉴(1944년 12월 25일생, 1970년 월드컵 베스트 11, 국적 : 브라질)
자이르지뉴는 1962년 칠레 월드컵에서 브라질의 우승을 이끈 '드리블의 귀재' 가린샤의 후계자로 꼽힌다.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드리블에 파워까지 겸비하며 상대 수비진을 무너뜨렸고 골에 대한 집념이 강했다. 측면에서 대각선 방향으로 문전 쇄도하는 성향을 즐기며 펠레에게 골 기회를 제공하거나 자신이 직접 골을 해결 지었다. 1970년 멕시코 월드컵에서는 브라질이 우승하기까지 매 경기 골을 넣는(6경기 7골) 경이적인 득점력을 과시했다. 하지만 이 대회에서 골든볼을 수상한 선수는 축구 황제 펠레였다.

4. 게르트 뮐러(1945년 11월 3일생, 1970년 월드컵 베스트 11, 국적 : 독일)
뮐러는 서독(독일) 축구가 자랑하는 전형적인 골잡이다. 펠레와 마라도나처럼 스피드와 개인기가 뛰어난 선수가 아닌데다 신장 176cm로서 장신이 아니었지만 골 냄새를 누구보다 잘 맡았다. A매치 62경기에서 68골, 바이에른 뮌헨에서 453경기에 나서 398골, 1970년 멕시코 월드컵 10골로 득점왕에 오른 데다 두 번의 해트트릭을 달성하는 괴력의 골 생산을 펼친 것. 뮐러가 속한 독일은 1970년 월드컵에서 브라질의 아성을 못 넘었지만 4년 뒤 서독 월드컵에서 우승의 기쁨을 누렸다. 크루이프-베켄바우어가 지배했던 1970년대 세계 축구계를 빛낸 또 하나의 축구 영웅으로 꼽힌다.

5. 롭 렌센브링크(1947년 6월 3일생, 1974-1978년 월드컵 베스트 11, 국적 : 네덜란드)
1970년대는 네덜란드의 토털사커가 꽃피우던 시절이었다. 역동성-압박-스위칭을 강화하며 탄탄한 조직력과 압박을 자랑했다. 당시 네덜란드의 에이스는 크루이프였지만 그의 조력자로서 왼쪽 윙 포워드인 렌센브링크의 맹활약이 빛났다. 뛰어난 볼 컨트롤과 활발한 움직임을 앞세워 크루이프를 비롯한 동료 선수의 공격력을 보완하는 역할에 강했다. 크루이프가 불참했던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에서는 5골을 넣었는데 그 중 4골이 페널티킥 골이었다. 1974년 서독 월드컵과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 준우승을 이끈 공로로 베스트 11에 선정됐다.

6. 코임브라 지쿠(1953년 3월 3일생, 1982년 월드컵 베스트 11, 국적 : 브라질)
지쿠는 공격형 미드필더로서 가공할 드리블, 패스, 프리킥을 비롯 공격수를 능가하는 슈팅 능력을 뽐내며 당시 브라질 축구 최고의 테크니션으로 각광받았다. 상대 수비 뒷 공간을 파고드는 패스를 찔러 넣는 과정 및 움직임이 인상적이었으며 '하얀 펠레'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러나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에서 감독과의 갈등 끝에 벤치로 밀렸고 1982년 스페인 월드컵 2라운드에서는 마라도나의 아르헨티나를 제압했으나 이탈리아에 덜미 잡혔다.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는 마라도나의 원맨쇼에 존재감이 가려졌다. 펠레와 비견되는 공격력을 지녔으나 월드컵 우승과 인연이 없었다.

7. 미셸 플라티니(1955년 6월 21일생, 1982-1986년 월드컵 베스트 11, 국적 : 프랑스)
플라티니는 지쿠와 더불어 1980년대 세계 최고의 공격형 미드필더를 다투었던 프랑스 축구의 영웅이다. 가공할 슈팅력과 날카로운 패싱력, 현란한 테크닉에 그림 같은 프리킥까지 장착하며 '아트사커'의 진수를 선보였다.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에서는 팀 전력에 이렇다 할 공헌을 하지 못해 프랑스가 1라운드에서 탈락했지만, 1982년 스페인 월드컵과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는 절정의 공격력을 과시하며 프랑스의 4강 진출을 이끌었고 월드컵 베스트 11에 이름을 내밀었다. 그러나 두 대회에서는 로시, 마라도나의 우승 공헌에 가려 2인자에 그쳤다.

8. 호르헤 발다노(1955년 10월 4일생, 1986년 월드컵 우승 주역, 국적 : 아르헨티나)
발다노는 현재 레알 마드리드 단장으로 유명하지만 현역 선수였던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는 마라도나와 더불어 아르헨티나의 우승을 이끈 주역이다. 한국과의 본선 첫 경기에서 2골 넣으며 3-1 승리를 이끈 것을 비롯, 본선 불가리아전 및 결승 서독전 1골로 총 4골 기록해 브론즈 슈(득점 3위)를 수상했다. 위력적인 포스트 플레이, 문전 앞에서 결정적인 득점력을 이끌어내며 1980년대 유럽 축구를 빛낸 공격수로 명성을 떨쳤지만 대표팀 통산 기록은 22경기 7골에 불과하다. 멕시코 월드컵에서 조국의 우승을 공헌했으나 마라도나라는 축구 영웅에 가려졌다.

9. 베베토(1964년 2월 16일생, 1994년 월드컵 우승 주역, 국적 : 브라질)
베베토는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 호마리우와 더불어 브라질의 우승을 이끈 쉐도우 스트라이커다. 감각적인 발재간과 빠른 순발력으로 상대 수비수를 따돌리는 재미난 공격력을 펼친 것. 본선 카메룬전, 16강 미국전, 8강 네덜란드전에서 골을 넣었지만 지구촌 축구팬들의 스포트라이트는 호마리우의 가공할 공격력에 시선을 모았다. 하지만 베베토가 네덜란드전에서 골을 넣은뒤 아들의 출산을 기뻐하며, 두 손으로 아기를 안으며 좌우로 흔드는 골 세리머니는 지금도 축구팬들의 머릿속에 생생하게 회자된다.

10. 릴리앙 튀랑(1972년 1월 1일생, 1998-2006년 월드컵 베스트 11, 국적 : 프랑스)
만약 프랑스가 튀랑없이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 나섰다면 우승 달성이 어려웠을지 모른다. 크로아티아와의 4강전에서 0-1로 패할 뻔했던 상황을 튀랑이 역전시켰기 때문. 튀랑은 대회 최고 복병이었던 크로아티아전에서 후반 2분 동점골, 후반 24분 역전골을 넣으며 조국의 2-1 승리를 이끌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대인마크와 끈기 넘치는 수비력으로 상대 공격수를 제압한 공로에 힘입어 호나우두-수케르에 이어 프랑스 월드컵 브론즈볼을 수상했다. 프랑스 월드컵 우승의 주역 지단보다 더 좋은 평가를 받은 것. 8년 뒤 독일 월드컵에서는 프랑스가 7경기에서 3실점만 허용했는데, 34세 베테랑 수비수 튀랑의 공이 컸다.

11. 히바우두(1972년 4월 19일생, 1998-2002년 월드컵 베스트 11, 국적 : 브라질)
브라질은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준우승과 2002년 한일 월드컵 우승을 통해 호나우두라는 축구황제를 배출했다. 하지만 호나우두와 더불어 지구촌 축구팬들의 화려한 주목을 끌었던 공격수는 히바우두다. '왼발의 달인'이라 불릴 만큼 왼발을 이용한 킥력이 뛰어났으며 빠른 드리블 돌파와 현련한 드리블 돌파 또한 일품 이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3골, 2002년 한일 월드컵 5골을 넣으며 선전했고 특히 한일 월드컵에서는 승부처에서 골과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스콜라리 브라질 감독에게 '히바우두가 월드컵 최고의 플레이어'라는 극찬을 받았다.

12. 미하엘 발라크(1976년 9월 26일생, 2002-2006년 월드컵 베스트 11, 국적 : 독일)
지단이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우승과 2006년 독일 월드컵 준우승을 통해 축구 황제로서의 진면목을 과시했지만, 발라크는 지단의 네임벨류에 가려진 경향이 짙다. 독일 대표팀의 플레이메이커로서 2002년 한일 월드컵 준우승, 2006년 독일 월드컵 3위라는 빼어난 성과를 거두었기 때문. 한일 월드컵에서는 독일이 답답한 경기를 펼친다는 외부의 비판 속에서도 8강 미국전, 4강 한국전 결승골로 조국의 결승 진출을 이끌었다. 독일 월드컵에서는 주장으로서 팀의 구심점을 맡아 날카로운 패싱력을 전개했다. 이번에도 주장으로 출전할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는 지단에 가려진 2인자가 아닌, 독일 우승의 주역으로 거듭나 1인자의 영광을 차지할지 주목된다.

*이 글은 Daum 스포츠 남아공 월드컵 특집 매거진에 실렸으며 Daum측의 허락을 받고 게재함을 밝힙니다.

Posted by 나이스블루

 


루이스 펠리페 스콜라리 감독이 이끄는 첼시가 24일 오후 9시 30분(이하 한국시간) JJB 스타디움서 열린 위건과의 프리미어리그 2라운드 원정 경기에서 1-0으로 승리했다. 첼시는 리그 2승을 기록함으로써 프리미어리그 우승을 향한 페이스를 순조롭게 이어갔다.

첼시는 올해 여름 이적 시장에서 스콜라리 감독과 데쿠, 보싱와의 영입으로 기존의 전력을 새롭게 탈바꿈했다. 그 결과 미드필더들이 수시로 자리를 바꾸며 짧고 정교한 스루패스와 이대일 패스 위주로 공격을 전개해 기존과 다른 공격 패턴을 보여 주었다. 오른쪽 풀백 보싱와는 공수 양면에서 맹활약을 펼쳐 고질적인 약점이었던 오른쪽 측면 뒷공간의 불안함을 떨쳤다. 리그 2경기 연속 무실점을 거듭중인 ´애쉴리 콜-카르발류-존 테리-보싱와´의 포백이 더 강해진 것.

그러나 위건전에서의 전반적인 전력은 ´완벽한 우승권의 팀´으로 보기에 부족함이 있었다. 골잡이 디디에 드록바가 부상에서 회복되지 않아 공격력이 떨어진 것은 사실이나 불안 요소는 이 뿐만이 아니다.

데쿠-발라크-램퍼드의 공존, 비효과적

4-1-4-1 포메이션을 구사하는 첼시는 세 명의 공격형 미드필더를 주전으로 기용했다. 데쿠와 미하엘 발라크, 프랭크 램퍼드가 그들이다. 첼시의 이번 시즌 우승 여부는 세 선수의 공존에서 판가름 될 만큼 이적생 데쿠의 가세로 팀 전력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여부에 관심이 집중됐다.

데쿠가 2경기 연속골을 터뜨리며 첼시의 새로운 에이스로 떠올랐지만 문제는 램퍼드의 활용 문제다. 첼시는 위건전에서 마이클 에시엔을 수비형 미드필더로 기용하고 ´램퍼드-발라크-데쿠-조 콜´로 짜인 미드필더진을 구축해 중앙에서 활약하던 램퍼드를 측면으로 돌렸다. 램퍼드는 왼쪽과 중앙을 오가며 짧은 스루패스로 경기를 풀었지만 ´에이스였던´ 그의 역량이 무리뉴-그랜트 시절보다 줄어든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문제는 램퍼드의 활동 반경이 왼쪽에서 중앙으로 쏠리면서 첼시의 공격이 중앙과 오른쪽 측면으로 집중됐다. 그러자 상대 수비진영은 첼시가 공격의 세 방향(왼쪽, 오른쪽, 중앙)중에 한 쪽을 포기하면서 두 쪽에 대한 압박을 맹렬하게 가했다. 램퍼드와 발라크, 데쿠의 위치가 중앙에 집중된 첼시는 상대의 기세에 많은 득점 기회를 살리지 못하고 전반 4분 데쿠의 프리킥 결승골을 얻는데 그쳤다.

데쿠와 발라크의 위치 또한 중복되고 있다. 첼시의 공격 방향이 ´수비진-에시엔-중앙 미드필더´로 향할때 마다 두 선수는 에시엔의 공을 받을 때 몇 차례 위치가 겹쳐 전체적인 공격의 균형이 맞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램퍼드가 왼쪽에서 중앙으로 돌파하면서 두 선수의 약점을 메워보려 했으나 오히려 왼쪽 공격을 살리지 못하는 역효과로 이어졌고 조 콜-아넬카와의 간격이 멀어져 공을 정확하게 연결할 수 있는 기회를 번번이 놓쳤다.

이 상황에서 레알 마드리드의 윙어로 활약중인 호비뉴가 영입되면 미드필더진의 문제는 골치 아파진다.

호비뉴가 첼시 스쿼드에 포함되면 조 콜과 램퍼드 중에 한 명이 주전에서 밀릴 수 있다. 그러나 최근 몇 시즌 동안 첼시 전력의 중심으로 활약했던 두 선수는 주전 자리를 쉽게 내줄 존재가 아니다. 호비뉴와 조 콜이 측면을 맡고 램퍼드의 중앙 전환 가능성이 커 램퍼드-발라크-데쿠 중에 한 명은 벤치 신세를 지게 되는데 결과적으로 세 선수의 공존은 팀 전력에 ´비 효과´를 안겨주고 있다.

발이 느린 아넬카, 첼시 스타일과 맞지 않아

위건전에서 답답한 경기를 펼친 원톱 니콜라스 아넬카 역시 팀 전력의 불안 요소다. 미드필더진의 위치 중복 문제로 2선에서 많은 공을 이어받지 못했지만 공을 받아내려는 움직임이 소극적이었다. 공을 잡을때 상대팀 수비수를 제끼려다 빼앗기는 장면도 몇 차례 있었다.

아넬카는 올해 1월 첼시 이적후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햇다. 이전 소속팀인 볼튼에서 59경기 출전 22골 10도움을 기록했지만 첼시에서는 24경기 3골 7도움에 불과하다. 첼시의 공격 강화를 위해 영입 되었지만 실질적으로는 드록바의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차출 공백을 막기 위한 ´백업´ 역할을 위해 푸른색 유니폼을 입은 것이 맞다.

´한때 앙리를 능가했던´ 아넬카는 좋은 공격수임에 분명하나 첼시에서는 부상중인 드록바를 대신하여 주전으로 투입되고 있다. 3톱을 쓰는 볼튼에서는 발 빠른 케빈 데이비스와 엘 하지 디우프(현 선더랜드)가 타겟맨인 자신에게 많은 골 기회를 제공한 덕분에 좋은 실적을 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드록바를 중심으로 공격이 짜여지는 첼시에서 그의 역할은 주연이 아닌 조연이었다. 안드리 셉첸코(현 AC밀란)가 첼시에서 실패했던 것과 비슷한 케이스.

아넬카와 셉첸코의 단점은 발이 느리고 기동력이 떨어지는 선수들이다. 발 빠른 타겟맨 드록바를 보조하는 스타일이 아닌데다 ´유독 첼시 유니폼을 입으면´ 활동량이 떨어져 상대 수비수들에게 고전을 면치 못했다. 첼시의 새로운 공격수로서 성공할 수 있는 토대는 드록바를 얼마만큼 보조하느냐에 따라 달려있다.

일부에서는 올 시즌 첼시의 공격진을 ´드록바-아넬카´ 투톱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첼시가 4-4-2 포메이션을 쓰면 ´과포화된´ 미드필더진의 역량이 떨어지는 단점이 있어 현실적으로 4-1-4-1 포메이션이 더 적합한 상황이다. 더구나 ´드록바-아넬카´ 투톱은 지난 시즌 몇차례 호흡을 맞췄으나 상대 수비진에 위협을 주는 결정적인 장면 없이 나사가 풀린 듯한 공격력을 일관했다.

어쩌면 스콜라리 감독이 본래 포지션이 쉐도우 스트라이커였던 호비뉴 영입을 원하는 이유가 이것 때문일 수도 있다. 만약 ´드록바-호비뉴´ 투톱이 형성되면 램퍼드-발라크-데쿠의 ´불안한´ 공존을 포기하고 두 공격수의 역량이 늘어날 것으로 보이며 아넬카는 철저한 벤치 신세를 지게 된다. 결과적으로 아넬카는 첼시 스타일과 맞지 않는 골잡이였던 것.

전임이었던 아브람 그랜트 전 감독이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 문턱에서 무너져 경질된 것 처럼, 스콜라리 감독은 최상의 전력을 앞세워 첼시의 우승을 이끌어야 하는 책임감을 안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첼시의 두 가지 불안 요소를 떨치고 우승을 일궈야 하는 과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호비뉴의 쉐도우 스트라이커 포진이 답이 될 가능성이 크다. 첼시에게 다행인 것은 호비뉴의 이적이 거의 성사직전이라는 것이다.


 

Posted by 나이스블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