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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고마워요, K리그의 자존심 '포항 스틸러스'

 

노병준의 프리킥이 골로 연결되는 순간, 트위터로 경기 문자 중계하던 저는 엄청난 환호성을 내지르며 박수를 쳤습니다. 후반 12분이면 골이 필요로 하는 순간이자 상대의 공격 기세를 꺾을 수 있는 절호의 시간대 였습니다. 더욱이 상대팀이 후반 시작과 함께 공격에 모든 힘을 쏟다보니 노병준의 골은 한 골 이상의 가치가 있었습니다. 노병준이 골을 넣는 순간, 저는 포항이 우승할거라 예상했고 그 예감은 결국 현실로 이루어졌습니다.

세르지오 파리아스 감독이 이끄는 포항이 마침내 AFC 챔피언스리그 우승컵을 들어 올렸습니다. 아시아 최고의 클럽을 가리는 결승전에서 '한국 킬러'이자 '중동의 깡패'로 불렸던 사우디 아라비아의 명문 알 이티하드를 2-1로 제압 했습니다. 동아시아와 중동 클럽 중에서 가장 공격적인 축구를 하기로 손꼽히는 두 팀의 대결에서 포항의 공격축구는 결승 무대에서도 빛을 발했습니다. 아시아 최고의 무대에서 K리그의 위상을 드높인 포항의 축구는 'K리그의 자존심'으로 치켜세우기에 충분합니다.

포항의 우승, 머릿속에 스친 5년전의 굴욕

포항의 우승이 값진 이유는 상대팀이 알 이티하드였기 때문입니다. 알 이티하드가 2004년과 2005년 AFC 챔피언스리그에서 우승하면서 한국 클럽을 상대로 많은 재미를 봤기 때문이죠. 당시 한국 클럽이었던 성남-전북-부산을 상대로 6경기 중에 4번이나 승리했습니다. 그것도 성남과 부산과의 원정 경기에서는 5-0 대승을 거두며 국내 축구팬들을 충격의 도가니로 몰아 넣었습니다. 알 이티하드의 파상적이고 조직적인 공격축구는 K리그 클럽이 막아내기에는 역량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5년 전인, 2004년 12월 1일은 축구팬인 저에게 '최악의 날'로 회자됩니다. 제가 지금까지 현장에서 봤던 축구 경기 중에서 가장 보고 싶지 않았던 경기였기 때문이죠. 성남 종합 운동장에서 있었던 2004 AFC 챔피언스리그 결승 2차전 성남vs알 이티하드의 경기는 저뿐만 아니라 그 경기를 관전했던 2만 5천여명의 관중들, 그리고 K리그를 사랑하는 모든 축구팬들에게 치욕과 같은 경기였으니까요.

당시 성남은 1차전 사우디 아라비아 원정에서 3-1로 승리했습니다. 그래서 홈에서 열리는 2차전에서 최소 1골 차이로 패하더라도 AFC 챔피언스리그 우승컵을 들어올릴 수 있었습니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알 이티하드는 '아시아의 깡패'가 아닌 '성남의 우승 제물'이 될 것 같았습니다. 저를 비롯한 모두가 성남의 우승 과정을 가볍게 여겼고 선수들의 경기 자세도 방심하는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결국, 성남은 알 이티하드에게 홈에서 0-5로 대패하는 '굴욕'을 당했습니다. K리그 역사에 잊혀지지 않을 치욕스런 순간을 저를 비롯한 2만 5천여명의 관중들이 두 눈으로 지켜 봤습니다.

이러한 성남의 대패에 관중석 분위기는 씁쓸했습니다. 성남의 무기력한 축구에 답답함을 감추지 못해 "똑바로 안해"라고 소리치시는 분이 있는가 하면, 제가 있던 근처에서 한 숨을 크게 내쉬는 분들도 여럿 있었습니다. 어떤 관중은 알 이티하드가 골을 넣는 모습에 어이없는 듯 웃으면서 현실을 부정하고 싶으셨고, 또 다른 관중은 경기 종료 후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당시 성남이 2001년 부터 2003년까지 3년 연속 K리그 우승했던 'K리그의 자존심'이었음을 상기하면 모두들 성남의 대패를 납득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후 K리그의 AFC 챔피언스리그 좌절은 '전북이 우승했던' 2006년을 제외하고 계속 되었습니다. 2005년에는 부산이 홈에서 알 이티하드에게 0-5로 패했고 2007년에는 성남과 전북이 당시 일본 최강인 우라와 레즈의 우승 제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지난해에는 포항과 전남이 AFC 챔피언스리그 8강 토너먼트 진출에 실패했습니다. 이러한 K리그의 내림세는 2년 연속 AFC 챔피언스리그 우승 팀을 배출한 일본 J리그의 오름세 행보와 대조적 이었습니다. 여기에 지난 여름 조모컵에서 K리그 올스타가 J리그 올스타에 1-4로 대패했던 것 까지, K리그의 경쟁력은 아시아 무대에서 점점 주춤했습니다.

포항 스틸러스, '아시아 최강' 자격 충분하다

하지만 포항의 축구는 달랐습니다. 지난해 AFC 챔피언스리그 8강 토너먼트 출에 실패하자 올해 초 '스틸러스 웨이'를 표방해 경기력과 태도에서 혁신적인 자세를 추구하며 공격 축구에 올인 했습니다. 공격 축구가 포항의 용광로 축구를 대표할 수 있는 색깔이자 수많은 축구팬들의 시선을 끌어 모을 수 있다는 것이 파리아스 감독의 의중 이었습니다.

그 과정은 아주 유쾌했습니다. 32강 조별 예선에서는 K리그 팀들 중에서 유일하게 1위로 16강 토너먼트 진출에 성공했습니다. 그 이후에는 뉴캐슬 제츠(호주)-분요도코르(우즈베키스탄)-움 살랄(카타르) 같은 강호들을 상대로 5경기에서 14골을 퍼붓는 공격축구로 팬들의 시선을 끌어 모았습니다. 특히 뉴캐슬과의 16강 단판 승부에서는 6-0 대승을 거두면서 아시아를 제패할 수 있는 경쟁력과 자신감을 키웠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알 이티하드를 2-1로 물리치면서 '스틸러스 웨이'의 완성을 알렸습니다.

공격 축구는 줄곧 공격만 시도하는 축구가 아닙니다. 안정된 수비를 기반으로 점유율을 높이며 활발한 공격 시도속에 상대의 허를 찌르는 골을 넣는 것이 공격 축구의 일반적인 과정입니다. 그래서 포항은 결승 단판 경기에서 수비에 신경쓴 모습이 역력 했습니다. 알 이티하드의 에이스이자 공격형 미드필더인 누르를 홀딩맨인 신형민이 끈질기게 마크하고, 공격형 미드필더 듀오인 김재성과 김태수가 신형민과 간격을 좁히면서 상대의 중앙 공격을 차단하는데 주력했습니다. 그리고 센터백인 황재원-김형일은 상대 투톱 공격수를 꽁꽁 묶으며 골을 내주지 않기 위해 사력을 다했습니다.

포항이 전반전에 알 이티하드에 결정적인 골 기회를 쉽게 허용하지 않았던 이유가 이 때문입니다. 미드필더진을 주축으로 수비 밸런스가 균형있게 잡혔기 때문에 상대 미드필더진에서 공격진으로 연결되는 공을 적시적소에 차단했습니다. 중동 축구가 경기 분위기에 휩쓸리기 쉬운 단점을 노려 상대의 공격 기세를 완전히 꺾었습니다. 특히 신형민이 누르의 공격 침투 차단에 성공했던 것이 '노병준 프리킥과 더불어' 승패가 갈렸던 결정적 계기가 됐습니다.

그래서 포항은 수비 작전이 성공하면서 공격에 자신감을 가졌습니다. 노병준-김태수-김재성의 반격을 앞세운 활발한 공격 시도로 상대의 미드필더진을 허무는데 주력했습니다. 비록 스테보의 몸이 평소보다 무거웠기 때문에 피니시가 약했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공격에 전념했습니다. 그리고 후반 12분과 20분 세트 피스 상황에서 노병준의 프리킥 골, 김형일의 헤딩슛으로 상대의 골망을 갈랐습니다. 골을 넣겠다는 포항의 의지가 세트 피스에서 빛을 발했습니다. 상대팀이 여러차례 세트 피스 기회를 제대로 살리지 못했음을 상기하면, 포항은 골 넣는 본능에 충실했습니다.

이러한 포항의 경기 내용은 '아시아 최강'으로 도약하는데 손색 없었습니다. 강팀을 상대로 어떻게 이겨야 하는지 알고 있었고 '화끈하게' 요리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포항의 우승은 알 이티하드 악몽에 시달렸던 국내 축구팬들에게 유쾌상쾌통쾌한 기쁨을 안겼습니다. 알 이티하드전 0-5 대패라는 예전의 안좋았던 추억도 이제는 포항의 우승으로 존재감이 떨어졌습니다. AFC 챔피언스리그에서 K리그의 자존심을 드높인 포항의 축구가 고마운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