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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골키퍼' 허정무, 한국 축구 실망이다

 

웃을일이 아닙니다. 허정무 감독이 대표팀 5대5 미니게임에서 직접 골키퍼 장갑을 착용하고 골키퍼 역할을 맡은 것은 어찌보면 좋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허정무 감독은 한국 축구 대표팀의 사령탑입니다. 한 나라의 대표팀 수장이면 그만큼의 권위가 따르는 것은 당연하며, 훈련 도중에 골키퍼를 맡은 것은 감독 체면에서 자의적으로 하고 싶은 행동은 아닙니다.

골키퍼를 맡은 허정무 감독의 속마음은 좋지 않을 것임에 분명합니다. 대한축구협회와 프로축구연맹이 대표팀 선수 차출을 둘러싼 갈등을 봉합하지 못했고 K리그 소속 선수들의 대표팀 합류가 늦어졌기 때문이죠. 그래서 지난 이틀 동안 해외파 10명만 참가하고 골키퍼가 없는 '반쪽 훈련'을 치르면서 어쩔 수 없이 허정무 감독과 김현태 골키퍼 코치가 직접 골키퍼 장갑을 손에 착용했습니다. 자신들이 하고 싶은게 아니라 골키퍼 맡을 사람이 없어서 그런 겁니다. 아마추어 축구부 골키퍼 데려오기에는 대표팀 체면과 위신이 떨어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죠.

지난 이틀 동안 대표팀의 전술을 가다듬기 위한 전술 훈련이 없었으니, 훈련 성과는 불 보듯 뻔합니다. 대표팀 훈련을 지휘해야 할 허정무 감독의 마음이 답답할 수 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해외파 10명의 마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해외 소속팀에서의 고된 시간을 뒤로하고 비행기에 몸을 실으며 국내에 들어왔더니, 감독이 골키퍼를 맡고 선수 인원 숫자가 부족한 훈련에 임하고 있는 겁니다. 열심히 하겠다는 선수들의 사기가 저하된게 아닌가 염려스럽습니다. 박지성이 훈련 종료 후 취재진과의 인터뷰를 통해 "우리가 족구팀도 아니고 골키퍼도 없는데 뭐..."라며 안타까워했죠.

물론 허정무 감독이 훈련 도중에 골키퍼를 맡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선수 인원 수 부족으로 어쩔 수 없이 골키퍼를 맡은 것은 한국 축구에 있어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야구로 치면 WBC 대표팀의 김인식 감독이 연습 도중 직접 포수 마스크를 쓰고 10명의 선수들을 지휘하는 것과 같은 꼴입니다. 10명이면 천하무적 야구단 선수 숫자와 똑같습니다.(백업선수 이현배 포함) 이게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이제 감이 잡히는지요.

축구협회와 연맹의 갈등도 축구팬 입장에서 낯뜨겁습니다. 축구협회는 선수 차출을 강력히 요구했고 연맹은 A매치 48시간 전에 소집에 응해야 한다는 국제축구연맹(FIFA)룰을 철저히 지키겠다고 주장하니 갈등이 벌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문제는 서로간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상대를 존중하기보다 남의 탓만 하고 있습니다. 당사자들이 직접 만나서 문제를 해결짓기 보다는 서로 싸우겠다고 으르렁거리니 축구계 혼란만 부추겼고 결국에는 자중지란 위기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이번 사태는 축구협회의 잘못이라는 것이 여론의 공통된 시각입니다. 축구협회는 월드컵 본선이 1년도 안남았기 때문에 K리그 선수들의 대표팀 조기 차출 및 지속적인 협력을 원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K리그에 희생을 강요했습니다. K리그는 그동안 수없이 대표팀 차출로 인한 적지 않은 손해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문제는 대표팀 차출을 둘러싼 축구협회와 K리그와의 갈등이 몇년째 이어졌다는 점입니다. 2003년 4월 A매치 일본전 이전, 당시 수원과 안양(현 FC서울)의 사령탑이었던 김호 감독과 조광래 감독이 축구협회에 반기를 들었고 그것이 점점 쌓이고 또 쌓이면서 갈등의 폭이 더 커지고 말았습니다.

연맹이 9월과 10월 A매치 데이가 토요일에 있음에도 그 다음날 K리그 일정을 잡은 것은 문제의 소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FIFA 규정에 의하면 A매치 일정이 국가 특성에 맞게 융통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유럽에서는 다음주 9일~10일에도 A매치 합니다. 그런데 축구협회는 A매치 흥행 목적 때문일지 몰라도 토요일 일정을 고집했습니다. 다음달 11일 토요일에 예정되었던 세네갈전을 14일로 연기하여 K리그와의 일정 중복은 피했지만 문제는 이번 호주전입니다. 호주전 다음날에 K리그 7경기가 열리기 때문이죠. 물론 연맹도 아쉬운 면이 없지 않습니다. 호주전만이라도 축구협회에 양보했다면 갈등은 커지지 않았을겁니다. 대표팀보다 자국리그가 우선시 되는 것은 당연하지만 이번 일은 융통성이 더 필요했습니다.

박지성과 이영표의 인터뷰도 불편합니다. 갈등의 원인을 연맹의 행정 문제로 돌리고 있으니 축구협회와 연맹의 논란을 부추기고 말았습니다. 솔직히 슈퍼스타의 말이 미치는 영향력이 이렇게 높을 줄 몰랐습니다. 선수 개인의 의견으로 가볍게 넘어갈수 있는 부분이지만 그러기에는 두 선수가 한국 축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컸습니다. 축구협회의 잘못으로 몰려있던 여론의 반응이 박지성-이영표의 발언에 의해 축구협회쪽에 명분이 실렸으니 축구팬 입장에서 답답할 일입니다. 야구 500만 관중을 운운하며 연맹의 관중 유치를 문제삼은 축구협회 간부 출신의 모 K리그 감독 발언은 그야말로 실망입니다.

어찌되었건 호주전은 오는 5일에 서울 월드컵 경기장에서 강행합니다. K리그 소속 대표팀 선수들은 오늘 대표팀에 합류하여 해외파 10명과 함께 발을 맞추게 됩니다. 허정무 감독이 손에 끼던 골키퍼 장갑도 이제는 이운재와 김영광, 정성룡 같은 K리그 골키퍼들의 몫으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축구협회와 연맹의 갈등은 봉합되지 않았습니다. 서로 대립각만 커지면서 앞으로도 선수 차출을 놓고 싸울 것임이 분명합니다. 개인적으로는 내년 1월 대표팀 장기 합숙 훈련을 놓고 두 단체의 갈등이 있을거라 생각합니다. K리그에 있어 대표팀 장기 합숙훈련은 이로울 것이 없기 때문이죠. 대표팀에 참가하는 선수들은 대표팀 선수이기 이전에는 K리그 선수이며 당연히 직장은 K리그 소속입니다. 이러다간 월드컵 본선에서 16강을 기대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축구팬 입장에서는 그저 혼란스러운 일이죠.

결국 죽어나는건 허정무 감독입니다. 축구협회와 연맹이 선수 차출을 놓고 싸우는데 훈련이 제대로 돌아갈리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허정무 감독은 훈련 도중 골키퍼 장갑을 쓰며 직접 골키퍼 역할을 맡았습니다. 허정무 감독은 훈련 환경이 제대로 갖춰지지 못했고 분위기 마저 어수선한 상황에서 성적 및 전술에 대한 여론의 압박까지 시달리면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을 것입니다. 대표팀 감독직이 힘들 수 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핌 베어벡 감독은 대표팀 차출 갈등과 여론의 압박 같은 악재를 이기지 못하고 아시안컵 종료 후 바로 사직했습니다. 또한 선수들도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훈련하고 싶지 않을 겁니다. 대표팀 훈련장 분위기가 무거우니 기분좋게 파주 NFC에 들어올 사람이 줄어들지 모를 일입니다.

대표팀 차출 논쟁만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지금의 축구 환경은 앞날의 한국 축구에 손해가 될 뿐입니다. 박지성이나 이영표 같은 스타들이 앞으로 20~30년 뒤에 대표팀 감독을 맡아 2009년의 허정무 감독처럼 훈련 도중에 골키퍼 장갑을 쓰고 있지 않을까 염려 됩니다. 아니면 그것보다 상상하기 싫은 시나리오가 기다리고 있겠죠. 한국 축구의 앞날을 생각하면 지금의 이 사태가 참으로 갑갑할 따릅입니다. 최근 축구 게시판에서 '내가 왜 축구팬을 하고 있나'와 같은 탄식성의 의견들이 나오는지를 한국 축구를 구성하는 사람들 모두가 인지해야 합니다.

p.s : 참고로 축구협회와 연맹은 서울 신문로 축구회관이라는 건물을 함께 쓰고 있습니다. 문제는 한 건물 내에서 두 조직이 서로 소통의 부재에 빠진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