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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박주영, '판타지스타' 안정환이 아니다

 

판타지스타(Fantasista)란 이탈리아어로 공을 잡는 것 만으로도 관중들을 저절로 환호하게 하는 선수를 말합니다. 판타지스타는 드리블과 패스, 그리고 슛으로 경기의 흐름을 바꾸면서 모두가 상상하기 힘든 플레이를 합니다. 대표적인 유형의 선수로 이탈리아 축구의 획을 그었던 로베르토 바조, 알렉산드로 델 피에로, 프란체스코 토티가 있었고 한국에는 안정환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안정환이 대표팀 복귀에 대한 꿈을 접었습니다. 안정환은 지난 7일 국내에 귀국하기 직전 신징바오와의 인터뷰를 통해 "대표팀은 어린 선수들이 성장해 좋은 결과를 내고 있다. 나 같은 선수는 빠지는 게 당연하다. 젊어진 대표팀에 합류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며 대표팀 복귀가 힘들어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올해 나이가 33세인데다 중국리그에서 활약하고 있는 요소들이 대표팀 복귀에 지장을 줄 것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입니다. 축구 선수로서 이미 황혼기를 밟았기 때문에 전성기 시절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은 더 이상 힘듭니다. 많은 축구팬들은 안정환이 대표팀에 없는 것을 아쉬워하고 있지만 선수 본인의 마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보다 더 아쉬운 것은 안정환과 같은 유형의 판타지스타가 한국 축구에서 별로 없다는 점입니다.
그나마 박지성이 두 번의 월드컵 최종예선 이란전을 통해 극적인 동점골을 넣은 것을 비롯해서 한국 공격에 없어선 안 될 에이스 역할을 하고 있지만, 전형적인 판타지스타와는 거리가 멉니다. 특유의 부지런한 기동력으로 한국 공격의 젖줄 역할을 도맡았지만 안정환처럼 역동적이고 세련된 느낌으로 경기를 운영하는 재치를 뽐내는 선수는 아닙니다. 맨유에서 공격보다는 궃은 역할이나 공간 창출에 무게감을 두는 경기를 펼치고 있다는 점에서 판타지스타라고 분류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일각에서는 박주영(24, AS 모나코)을 가리켜 판타지스타로 지칭합니다. 어쩌면 판타지스타가 맞을수도 있습니다. 청구고와 고려대, 그리고 청소년대표팀과 FC서울 입단 초기에 지능적인 경기 운영과 화려한 기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골 감각을 통해 한국 축구의 새로운 희망으로 거듭났기 때문입니다. 특히 2005년초 카타르에서 열렸던 청소년 대회에서 9골을 넣으며 한국의 우승을 이끌었던 장면은 자신의 축구 인생에 최대 모멘트를 찍었던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박주영은 4년 전의 박주영과 다릅니다. 청소년대표팀과 서울 입단 초기 시절과 달리 시원스런 득점력을 보이지 못했으며 상대 수비보다 확실한 우위를 점하는 모습이 떨어집니다. 2~3명의 상대 수비수를 순식간에 따돌릴 수 있는 엄청난 순간 가속도에 의한 공격 전개도 주춤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예전과 다르게 이타적인 선수로 성장의 물꼬를 트고 있습니다. 한국 축구 골 결정력의 해답이었던 박주영의 경기력이 세월이 흘러 변화한 것입니다. 그 변화도 축구팬들이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향했습니다.

박주영은 지금도 프랑스리그에서의 활약을 통해 끊임없이 성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장이라는 것도 축구 외적인 환경과 풍토가 뒷받침 되어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박주영은 2005년 후기리그를 시작으로 2009년 초에 이르기까지 3~4년의 시간을 침체의 나날로 보냈습니다. 2005년 후기리그에서 상대팀들의 집중견제에 읽혀 부진하더니 잦은 대표팀 차출로 인한 혹사로 부상까지 겹쳐 예전의 번뜩이는 킬러 본능을 잃고 말았습니다.

특히 지난 6월 국가대표팀과 청소년대표팀 원정 경기를 위해 한국-우즈베키스탄-쿠웨이트-네덜란드로 향하는 '죽음의 원정'을 소화하며 몸을 무리했던 것이, 결국 U-20 월드컵 부진과 혹사로 인한 후유증으로 이어졌습니다. 그 혹사는 이듬해 각급 대표팀 차출(국가대표, 올림픽대표, 아시안게임대표)로 이어지면서 몸을 쉴 수 있는 기회를 좀처럼 얻지 못했습니다. 1월에는 국가대표팀 조기 차출 및 A매치 평가전으로 남들보다 시즌을 일찍 보냈고 K리그 시즌 종료 이후에는 아시안게임 대표팀에서 뛰었습니다. 그 후유증은 2007년에 이르러 잦은 부상으로 이어지면서 청소년대표팀 시절의 화려했던 감각을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박주영은 젊은 선수 치고는 긴 시간 동안 성장통을 앓았습니다. 또래 선수들과 달리 너무 급속도로 성장했기 때문에 그동안 바람잘 날 없는 나날을 보냈던 겁니다. 하지만 성장세가 빠르지 않았다면 지금의 박주영도, 2005년 신드롬도 없었을 것입니다. 결국에는 한국 축구의 근시안적인 선수 관리가 박주영에게 희생을 강요했던 것입니다.

만약 박주영에게 유연한 경기 운영능력으로 팀의 공격을 이끄는 플레이메이커 기질이 없었다면 슬럼프 탈출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원 포지션이 처진 공격수였기 때문에 경기를 읽는 시야와 센스가 또래 선수들보다 뛰어났고, 공격 전개 능력이 떨어지는 모나코에서 팀의 중심 선수로 자리잡을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었습니다. 모나코 소식을 전하는 ASM풋은 지난 7일 "박주영은 동료 선수들의 공격력을 지원하는 공격수 역할을 맡았다. 끊임없는 움직임과 기술력이 동료 선수들을 행복하게 했다. 그는 지나칠 정도로 이타적인 선수이며 키가 크지 않음에도 제공권 장악능력이 뛰어났다"며 박주영의 지난 시즌 활약을 칭찬했습니다.
 
하지만 박주영은 안정환 만큼의 결정력이 떨어집니다. 안정환이 월드컵 본선에서 넣은 3골은, 3골이라는 숫자의 가치보다 임펙트가 컸고 평가전에서도 천부적인 공격 재능을 맘껏 쏟으며 상대 골망을 흔들었습니다. 하지만 박주영은 중요한 무대에서 자신이 판타지 스타라는 것을 증명하지 못했습니다. 프랑스리그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팀의 공격 물줄기 역할을 도맡고 있음에도 이타적인 경기력에 치우치면서 슈팅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패스하기 위해 바쁜 모습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31경기에서 5골에 그친 것도 때로는 이기적으로, 때로는 이타적으로 경기를 풀어가는 모습이 능숙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박주영은 프랑스리그에서 더 성장해야 할 선수입니다. 지난 시즌이 슬럼프에서 벗어나는 단계였다면 올 시즌에는 그동안 빛을 보지 못했던 공격의 우아함을 꽆피워야 할 시점입니다. 박주영이 안정환처럼 판타지스타로 이름을 떨치려면 청소년대표팀 시절 순도 높은 공격력을 발휘했던 감각을 되찾으며 팀 공격의 무게감을 스스로 실어주어야 합니다. 만약 지금에 만족하면 그 레벨에 머물 수 밖에 없음을 선수 본인이 깨달아야 합니다. 그동안 내제되었던 잠재력이 완전히 만개하기를 바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