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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박지성, '차범근 아성'에 도전장 내밀다

 

필자가 초등학교 5학년 이었던 1995년 이었습니다. MBC에서는 금요일 저녁 6시가 되면 1시간 동안 축구관련 프로를 방영했는데 차범근 감독과 이윤철 아나운서가 고정으로 진행했습니다. 그 방송은 한국과 세계 축구에 대한 현황과 독일 분데스리가 하이라이트, 2002 월드컵 개최 준비 관련 프로그램, 그리고 차범근 감독이 전국에 있는 학교를 돌며 유소년에게 축구 기술을 가르치는 코너가 방영 됐습니다.

제가 가장 유익하게 봤던 것은 차범근 감독이 유소년들 앞에서 직접 보여주던 기술이었습니다. 상대를 제치는 여러가지 턴 동작과 페인팅, 드리블, 슈팅 등등 많은 것들을 꼼꼼하고 자세하게 가르치시더군요. 강습 시간이 끝나면 꿈나무들과 어깨동무로 하나되어 <축구왕 슛돌이> 주제곡을 불렀습니다. 그때부터 저의 머릿속에는 '차범근=축구 잘하는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박히기 시작했는데 나중에는 그가 한국 축구를 빛냈던 월드 스타 출신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방송에서 꿈나무들이 차범근 감독이 가르친 것을 따라하면서 열의를 다하는 모습이 어찌나 마음에 들던지 감탄할때가 많았습니다.

그 시절 차범근 감독에 대하여 부러운 것이 딱 하나 있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차범근 축구 교실입니다. 필자가 속한 반에서 가장 축구 잘하는 녀석이 여름방학때 차범근 축구 교실에서 차범근 감독을 통해 축구 기술들을 직접 배웠다고 자랑했죠. 그 녀석은 차범근 감독을 얼마나 좋아하던지 실내화 주머니도 차범근 감독이 직접 사인한 물품을 즐겨 이용했습니다. 차범근이라는 사람의 영향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그때부터 실감하게 됐습니다. 특히 장래에 축구 선수를 꿈꾸던 아이들에게는 차범근 축구 교실이 일종의 통과의례와도 같았습니다. 그 녀석도 축구 선수가 되길 희망했었죠.(결국 부모님 반대로 실패했지만)

지금까지 차범근 축구교실에서 역대 대상을 맞았던 선수들 중에는 우리들의 이름에 낯이 익은 케이스가 있습니다. '산소탱크' 박지성(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을 비롯해서 김두현(웨스트 브롬위치) 이동국, 최태욱(이상 전북) 조용태, 이상호(이상 수원) 기성용(서울)이 그들이었죠. 조성환(삿포로) 정조국(서울) 김동석(울산) 등도 차범근 축구교실 출신이죠. 그리고 인기 드라마 <꽃보다 남자>에서 구준표 역을 맡았던 탤런트 이민호도 차범근 축구교실에서 공격수를 맡을 정도로 축구를 잘했다고 하네요.

여기서 한 선수의 이름이 눈에 띱니다. 바로 박지성입니다. 박지성은 차범근 감독에 이어 유럽 축구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아시아의 축구 영웅입니다. 그런 선수가 차범근 축구교실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것이죠. 아마도 감수성이 예민했을 어린 시절에 제2의 차범근을 꿈꾸며 공을 다루었을 것임이 분명합니다. 어렸을적 부터 국가대표를 꿈꾸었으니 차범근 감독과 같은 존재가 되고 싶은 것은 박지성 뿐만이 아니었을 겁니다. 공교롭게도 박지성도 유소년 축구교실 운영을 꿈꾸고 있다죠. 이미 수원에 부지 공사 진행중입니다.

박지성은 세계 최고의 축구팀인 맨유에서 네 시즌 동안 두각을 나타낸 한국인 선수로서 많은 우승 경력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프리미어리그 3시즌 연속 우승,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 1번, 클럽 월드컵 우승 1번, 칼링컵 우승 2번이 그것 입니다. 우승 경력만 놓고 보면 차범근 감독을 충분히 압도합니다. 차 감독은 정규리그 우승 경력이 없을 뿐더러 챔피언스리그보다 권위가 낮은 UEFA컵에서는 2번 우승했으니까요.(그 시절 UEFA컵 권위는 지금처럼 낮지 않았지만)

요즘에는 박지성의 맨유 경기를 즐겨보는 젊은 사람들을 가리켜 '박지성 세대'라고 합니다. 이 사람들의 주된 공통점은 차범근 감독이 독일 분데스리가를 주름잡던 현역 시절 경기력을 못봤다는 것입니다. 저도 마찬가지 입니다. 차범근 감독이 은퇴하던 1988년에는 5살에 불과했으니까요. 그때는 축구라는 개념도 몰랐고 서울 올림픽을 본 기억도 없습니다.(다리 골절 부상으로 병원에 입원해서 그런듯) 해외파 경기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즐겨본 것은 박지성 경기 밖에 없습니다. 2000년대 초반 SBS 축구채널에서 보여줬던 교토 퍼플상가 경기, 그리고 MBC ESPN으로 넘어가면서 PSV 에인트호벤과 지금의 맨유가 있었죠.

'박지성 세대' 전부가 그런것은 아니지만, 박지성의 경기력을 아시아 최고라고 단정지을 수 밖에 없습니다. 박지성을 따라잡을만한 아시아 축구 선수가 없기 때문이죠. 적어도 동양권에서는 박지성의 클래스를 따라잡을 만한 선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박지성은 세계 최고의 팀인 맨유의 주요 멤버로 뛰고 있기 때문이죠. 그것도 네 시즌 동안 두각을 나타냈고 강팀과의 경기에 강한 모습을 발휘했으니 국내 팬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맨유가 한국 국가대표팀보다 더 인기 많은 '국민팀'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던 것도 박지성의 존재감이 결정적 이었습니다.(국가대표팀의 인기는 예전보다 많이 떨어졌습니다. 상암 6만 관중은 이제 옛날일이지요. 국가대표팀 경기력이 몇년 째 좋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박지성의 선전을 상징하는 것은 다름아닌 우승 경력입니다. 2005년 맨유 입단 이후 프리미어리그 3연속 우승,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 1번, 클럽 월드컵 우승 1번, 칼링컵 우승 2번이 그것이죠. 아시아 선수 중에서 이렇게 화려한 우승 경력을 자랑하는 선수는 없는데다 앞으로 박지성의 우승 경력을 능가할 선수는 나타나기 힘들 것임이 분명합니다. 또한 박지성의 우승 경력은 차범근 감독을 능가하고 있습니다. 차범근 감독은 독일 분데스리가 시절에 정규리그 우승이 없는데다 챔피언스리그보다 권위가 낮은 UEFA컵에서 두번 우승했으니까요. 이것 때문에 일부 박지성팬들은 '박지성>차범근'이 아니냐는 논리를 펴기도 합니다.

하지만 박지성과 차범근 감독을 비교하는 것은 '펠레vs마라도나'를 비교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동시대에 뛴 선수들이 아닌데 어떻게 비교가 가능할까요. 박지성과 차범근 감독이 속했던 팀의 성적은 엄연히 차이가 있었고 옛날의 축구 스타일과 지금의 축구 스타일은 전혀 다릅니다. 차범근 감독은 프랑크푸르트와 레버쿠젠에서 주전 공격수로 뛰었지만 박지성은 팀의 확고한 주전이 아닙니다. 하물며 두 사람은 서로의 스타일 또는 장점이 다르죠. 그리고 또 한가지의 차이점은 '박지성 세대'는 차범근 감독의 전성기 시절 경기력을 박지성 경기 보듯이 즐겨보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박지성vs차범근' 비교가 불가능한 이유가 이 때문입니다.

사실 박지성의 우승 경력은 흠집을 잡을만한 것들이 여럿 있습니다. 프리미어리그 우승 메달을 목에 걸었던 2006/07시즌과 2007/08시즌에는 부상으로 많은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고 지난 시즌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는 18인 엔트리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습니다. 올 시즌 칼링컵에서는 소속팀의 6번 경기중에서 단 한 번만 출전하고도 우승 메달을 받았죠. 냉정히 말해, 박지성은 차범근의 클래스를 따라잡지 못했습니다. 축구 전문가들이 박지성이 아닌 차범근 감독을 치켜 세우는 이유가 이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렇게는 말할 수 있습니다. 박지성의 신화는 현재 진행형일 뿐이라고요. 분명 언젠가는 차범근 감독과 같은 전설적인 반열에 올라설 것임이 분명합니다. 아직은 한창 펄펄 뛰어야 할 시기이기 때문에 유럽에서 이루어야 할 것도 많습니다. 차범근 감독이 전설이라면 박지성은 영웅입니다.

어쩌면 박지성의 신화는 이제부터가 시작이 아닐까 합니다. 28일 오전 3시 45분(이하 한국시간) 이탈리아 로마 스테디오 올림피코 스타디움에서 열릴 2008/09시즌 챔피언스리그 결승 FC 바르셀로나전이 그것입니다. 지난 시즌에는 18인 엔트리에 뽑히지 못했지만 올 시즌은 경기에 출전할 가능성이 큽니다. 지난 시즌과 올 시즌 팀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위상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죠. 박지성 본인 조차 '올 시즌이 맨유 입단 후 최고의 시즌'이라고 자평할 정도로 말입니다. 알렉스 퍼거슨 감독도 박지성이 결승전에서 실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공언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그라운드를 밟을 것임이 분명합니다. 그동안 강팀과의 경기에서 좋은 모습들을 많이 보여줬기 때문에 맹활약이 기대될 수 밖에 없습니다.

박지성이 챔피언스리그 우승컵을 들어올릴 가능성은 50% 입니다. 맨유가 이기면 우승 메달을 받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어쩔 수 없습니다. 맨유의 주축 선수로서 아시아 선수 최초로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그라운드를 밟아 우승 메달을 목에 거는 것은 의미와 상징성이 큽니다. 동시에 차범근 감독에 이은 또 하나의 아시아 축구 전설이 될 자격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죠. 차범근 감독이 저를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커다란 영향력을 뽐냈던 것 처럼 박지성도 그 반열에 오를 것입니다.

그런 박지성은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출전을 통해 차범근 감독의 아성에 도전장을 내밀었습니다. 한때는 차범근 축구 교실에서 뛰던 어린이였지만 이제는 차범근 감독이 유럽축구에서 쌓아 올렸던 클래스에 견줄 수 있는 축구 선수로 발돋움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번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이 중요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항상 꺼지지 않는 열정으로 그라운드를 뜨겁게 휘저었던 박지성의 종횡무진 질주가 스타디오 올림피코 스타디움에서 빛을 발할지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