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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단숨에 읽는 축구의 역사

 

흔히 축구는 전쟁에 비유된다. 11명이 하나의 팀이 되면서 오직 승리를 위해 반드시 상대팀을 이겨야 한다. 실제 전쟁에서도 다른 집단을 제압하기 위해 군사적인 충돌을 강행한다. 그런 본질이 축구에서도 나타난다. 상대팀보다 더 많은 골을 넣어야 승리하는 본성이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격렬한 몸싸움과 태클을 가하며 상대 선수의 공격을 방해한다. 또 선수끼리의 신경전이 벌어질 때가 있지만 그것을 엄격히 규제할 수 없는 노릇이다. 축구는 대립적인 정체성을 띄고 있으니까. 많은 사람들은 어렸을 적부터 동네 친구들과 두 발을 이용하여 축구공을 다루었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구성원마다 축구 실력의 편차는 있겠지만 적어도 상대팀을 이기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다.

축구는 결과 중심의 스포츠다. 아무리 경기 내용이 좋아도 원하는 성과를 이루지 못하면 전쟁에서 패한 것과 같은 입장이 된다. 선수는 경기에서 혼신의 힘을 다하며 상대팀 선수를 제치거나 막아야 하며, 패스 또는 개인 기술을 통해서 동료 선수의 골을 도와주거나 넣어야 한다. 감독은 상대팀 지략을 간파할 용병술을 발휘하며 선수들의 전술적인 움직임을 유도해야 한다. 여기에 상대팀과의 갈등 관계가 형성되면 반드시 이기고 싶은 마음이 발동한다. 그런 대립이 쌓이고 또 쌓이면서 사람들이 축구의 격렬함에 마음이 이끌렸다. 축구가 오늘날 세계 최고의 인기 스포츠로 거듭났던 배경이자 우리가 축구에 열광하는 이유다.

축구의 기원 살펴보기

흔히 말하는 축구 종주국은 영국이다. 한국의 태권도처럼 영국의 고유적인 스포츠로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 축구의 기원은 다양한 설이 전해진다. 기원전 200년경에는 중국에서 추슈(蹴鞠, 축국)라는 구기 종목이 등장했다. 신체의 발을 통해서 가죽으로 만들어진 공을 다루는 행위다. 그런 이유로 중국은 자신들이 축구의 발상지라고 주장했고 2004년에는 제프 블라터 FIFA 회장이 중국의 입장에 동의했다.

그러나 축구가 어느 곳에서 먼저 탄생했는지는 불확실하다. 기원전 1500년경에는 중앙아메리카에서 고무공을 만들었고, 기원전 7~6세기에는 그리스에서 ‘하르파스톤(Harpaston)’이라는 공놀이가 탄생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하르파스톤은 훗날 로마 시대에 '하르파스툼(Harpastum)'으로 전파됐다고 한다. 한국 <삼국사기>에서는 신라 시대의 장수 김유신이 625년경에 김춘추(태종무열왕)와 축국을 했다는 내용이 소개됐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과거에 축구와 비슷한 형태의 공놀이가 세계 여러 곳에서 성행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영국이 축구 종주국으로 굳어진 이유는 오늘날의 현대 축구를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1863년에는 세계 최초로 축구협회(FA)를 설립하여 여러 가지 경기 규칙을 제정했다.(그 이전에는 케임브리지 대학생이 축구 규칙을 정했거나, 셰필드FC가 축구 규정집을 만들었지만) 손으로 공을 만지거나 다른 팀 선수의 발을 거는 행위가 제약을 받게 됐다. 1872년에는 영국 연방에 속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경기하면서 역사상 첫 A매치로 전해졌다. 1888년에는 세계 최초의 공식적인 축구 리그가 개최됐다. 당시 풋볼 리그(Football League)라는 이름으로 12개 클럽이 참가했다. 원년 우승팀은 프레스턴 노스 엔드였다. 1992년에는 우리에게 낯익은 프리미어리그(Premier League)라는 명칭으로 변경됐다.

본래 영국 축구는 과격했다. 특히 중세 시대에는 단순히 거친 몸싸움에서 벗어나 상대방을 때리는 경우가 많았다고 전해진다. 지금처럼 11명이 팀을 이룬 것도 아니다. 선수 숫자와 관계없이 마을에 속한 사람들이 다른 마을 팀과 공을 다투면서 몸을 내던지는 집단적인 축구를 했다. 서로 폭력이 오가는 과정에서 사상자가 발생했고 한때 상위 계급에게 '축구 금지' 처분을 받게 됐다. 그럼에도 축구가 사라지지 않았던 이유는 서민들이 공놀이를 즐겼기 때문이다. 18세기 후반~19세기 무렵에는 산업혁명을 계기로 도시 중심의 공업화가 이루어졌다. 일자리를 위해 농촌을 떠나 도시로 이주하는 서민들이 많아지면서 노동자 계급의 축구 참여가 늘어났다. 그 사이에 영국 학교들이 운동의 필요성을 인식하면서 축구가 도입됐다. 축구를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규칙의 필요성을 인식했고 1863년 런던에서 FA를 창설하면서 표준 규칙을 시행하게 됐다.

더비, 축구를 재미있게 하는 그 이름

최근 한국 축구에서는 '더비(Derby)'라는 이름이 자주 등장하기 시작했다. 남북 대표팀이 경기를 펼칠 때, 박지성과 이청용 같은 유럽에서 뛰는 한국인 선수끼리 맞대결이 성사될 때 언론에서는 '코리안 더비'라는 이름을 붙이며 대중들의 시선을 끈다. 2010년 2월 한국과 일본 대표팀이 동아시아축구 선수권대회에서 맞붙었을 때는 '경질 더비'라는 신조어가 나타났다. 당시 팀을 맡았던 허정무 감독과 오카다 다케시 감독이 침체된 팀 성적으로 양국 여론의 경질 압박을 받으면서 경질 더비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K리그에서는 포항-울산(동해안 더비) 전북-전남(호남 더비) 서울-전북(티아라 더비, 러비 더비)의 대결이 더비라는 명칭으로 주목받게 됐다.

실제 더비는 같은 도시를 연고로 하는 클럽끼리의 맞대결을 뜻한다. 맨체스터 더비(맨체스터 유나이티드-맨체스터 시티) 머지사이드 더비(리버풀-에버턴) 북런던 더비(아스널-토트넘) 올드 펌 더비(셀틱-레인저스) 밀라노 더비(AC밀란-인터 밀란) 로마 더비(AS로마-라치오) 수페르 클라시코(보카 주니어스-리베르 플라테)가 대표적인 더비 매치다. 지역적인 개념이 강하다고 봐야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더비라는 이름이 다소 억지스럽게 붙여진 경향이 있다. 그럼에도 더비 명칭이 어색하지 않은 이유는 대중들의 흥미를 유발하는 언어적인 도구이기 때문이다. 몇몇 더비 이름은 본래의 뜻에서 벗어났지만 사람들에게 축구를 재미있게 접근 시키는 것은 분명하다.

더비는 긴장감과 팽팽함의 연속이다. 두 팀이 축구하는 것뿐만 아니라 반드시 상대를 넘어뜨려 이기겠다는 승리 욕이 넘쳐난다. 과도한 몸싸움을 펼치거나, 위험한 파울이 속출하거나, 서로 한 발 더 뛰려고 투쟁적인 자세를 발휘하는 경우가 많다. 때로는 난투극으로 이어진다. 선수-코칭스태프-팬이 흥분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때로는 팬들의 극성이 폭력으로 치닫는다. 몇 년 전 로마더비에서는 일부 팬이 소지한 물품 중에 칼, 톱, 도끼, 방망이 같은 흉기들이 압수됐다. 또 더비는 지역적 개념을 비롯해서 정치 및 종교적인 이유로 갈등을 빚는 경우가 있다. 밀라노 더비를 형성하는 AC밀란과 인터 밀란은 각각 좌파-우파, 노동자-재력가 대립 구조가 형성됐다.(다만,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AC밀란 구단주는 우파 성향의 인물이다.) 기성용-차두리 활약으로 우리들에게 익숙한 올드 펌 더비는 가톨릭(셀틱)-개신교(레인저스)의 경쟁이다.

잉글랜드(영국 4개 연방중에 하나)에서는 지역을 기반으로 50개 넘는 더비가 존재한다. 과거부터 마을 단위로 축구팀이 만들어지면서 지역 애착심이 남다르다. 그 마음이 때로는 지역감정으로 이어질 때가 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리버풀은 같은 연고지가 아니지만 노스-웨스트 더비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맨체스터와 리버풀은 잉글랜드 북서쪽에 위치했으며 본래 지역감정이 심하다. 두 도시는 과거 산업도시로 발전했으나 1893년 맨체스터 운하가 개설되자 리버풀 지역의 경제가 안 좋아진 것이 화근이 됐다. 최근에도 마찬가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현지 팬들이 부르는 '박지성 송'(개고기 송으로 알려진 노래)에는 "쥐를 먹는 리버풀 녀석보다 나으니까"라는 리버풀을 비하하는 가사가 삽입됐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있다. 스페인 축구의 양대 산맥 레알 마드리드-FC 바르셀로나의 '엘 클라시코 더비'는 같은 도시 혹은 비슷한 지역이 아님에도 어떻게 더비 관계로 발전했을까. 더비는 지역 외에도 라이벌 형태의 대립이 존재한다. 엘 클라시코(스페인어 : El Clásico)의 뜻은 고전의 승부이며 영어로는 'The Classic'으로 표현된다. 두 팀은 그동안 많은 우승컵을 거머쥐었던 스페인을 대표하는 명문 구단이다. 여기에 카스티야(레알 마드리드)-카탈루냐(FC 바르셀로나) 사이의 지역감정, 스페인 내전 같은 여러 가지 대립 관계들이 얽히면서 오늘날까지 치열한 라이벌 관계를 형성했다. 또 이탈리아의 유벤투스-인터 밀란 대결은 이탈리아 더비로 불린다.

월드컵, 세계 최고의 축구 축제

세계에서 축구가 사랑받는 대표적인 원동력을 꼽으라면 월드컵이다. 국제축구연맹(FIFA)가 4년에 한 번씩 주최하는 축구 대회로써 세계에서 축구 실력이 뛰어난 대표 팀을 가린다. 월드컵 본선은 32개국이 참가하지만 2006년 독일 월드컵 누적 시청자가 262억 9천만 명으로 추산 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월드컵 열기를 즐긴다. 2006년 기준 세계 인구가 65억 명임을 감안하면 축구가 지상 최대의 스포츠 제전임을 알 수 있다. 월드컵의 대중적인 강점은 국가의 경제적 효과, 광고와 스포츠를 비롯한 수많은 기업들의 매출 및 브랜드 가치 증대(예를 들면 A보드, 축구 대표팀 유니폼 등)로 이어진다.

월드컵 기원은 1904년 FIFA 창설 전후로 거슬러간다. 당시에는 유럽과 남미에서 축구 보급이 빠르게 확산되었지만 세계 최고의 축구팀을 가리는 공식적인 대회가 없었다. 1908년 하계 올림픽부터 축구가 정식 종목으로 채택됐으나 아마추어 선수들이 참가 자격을 얻었던 한계가 있었다. 이에 FIFA는 줄 리메 당시 회장을 중심으로 세계적인 축구 대회의 필요성을 인식했고 마침내 1930년 제1회 월드컵이 우루과이에서 개최됐다. 당시 13개국이 참가했지만 지금처럼 예선과 본선으로 구분되어 대회가 진행되지 않았다. 월드컵 초대 우승팀은 개최국 우루과이였다.

하지만 월드컵은 세계 최고의 축구 축제로 거듭나기까지 성장 통에 시달렸다. '축구 종가' 잉글랜드(영국은 잉글랜드-스코틀랜드-웨일즈-북아일랜드 축구협회가 따로 운영된다.)는 FIFA가 프랑스인 주도로 운영되는 것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이유로 FIFA를 탈퇴했고 월드컵 초기에 불참했다. 비슷한 시기에는 몇몇 팀들이 장거리 이동에 부담을 느껴 월드컵 참가를 꺼렸다. 1942년과 1946년 월드컵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취소됐다. 그럼에도 월드컵은 1950년에 재개되면서 참가국 숫자가 늘어났고 1970년 멕시코 월드컵에서는 위성 생중계가 도입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방송을 통해 월드컵을 시청했다. 여기에 펠레(브라질)를 비롯한 세계적인 축구 영웅들이 등장하면서 월드컵은 지구촌에서 가장 사랑받는 스포츠 이벤트로 떠올랐다.

월드컵 최다 우승국은 브라질이다. 1958년, 1962년, 1970년, 1994년, 2002년 월드컵 우승을 계기로 '세계 최강'의 명성을 떨쳤다. 지금까지 모든 월드컵 대회 본선에 진출했으며 월드컵 통산 최다 승리(67승) 기록을 보유했다. 1970년 멕시코 월드컵을 통해서 최초 3회 우승을 달성하여 당시 우승 트로피였던 줄리메컵을 영구 보관하게 됐다. 가장 최근에 개최된 2010년 남아공 월드컵은 스페인이 처음으로 우승의 영예를 안았다. 이 대회에서 한국과 일본은 사상 첫 월드컵 원정 16강 진출을 달성했다. 두 나라는 2002년 월드컵을 공동 개최했으며 한국은 아시아 최초로 4강에 진출했다.

펠레와 마라도나, 그리고 호나우두와 지단

역대 월드컵을 빛낸 대표적인 축구 영웅은 누굴까? 여러 명을 거론할 수 있겠지만 그 중에서 '축구 황제' 펠레를 첫 손가락으로 꼽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펠레는 1958, 1962, 1970년 월드컵에서 브라질 우승을 이끈 주역이다. 특히 1958년 월드컵 8강 웨일즈전 득점으로 당시 월드컵 최연소 골을(17세 239일) 기록했으며, 4강 프랑스전에서 해트트릭을 달성하며 세계 축구팬들의 이목을 끌었다. 결승 스웨덴전에서는 두 골을 넣으며 브라질의 첫 우승을 견인했다. 1962년 월드컵에서는 브라질 2연패 속에서도 부상으로 많은 경기를 뛰지 못했지만 1970년 월드컵에서는 제르손-토스탕-자이르지뉴-히벨리누와 함께 서로 힘을 모아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동시에 대회 골든볼(MVP)에 선정됐다. 월드컵 역사상 3번의 우승을 경험한 유일한 선수는 펠레다.

그런 펠레와 더불어 역대 최고의 축구 선수로 추앙 받아온 선수가 있다. 아르헨티나 축구 영웅 디에고 마라도나가 그 주인공. 166cm의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개인기, 볼 컨트롤, 패싱력, 슈팅, 창조성 등에 이르기까지 공격수로서 엄청난 파괴력을 자랑했다. 1986년 월드컵에서는 아르헨티나 주장을 착용하고 모든 경기에서 원맨쇼 기질을 발휘했다. 특히 8강 잉글랜드전에서는 후반 6분 상대 골키퍼와 경합하는 도중에 공중볼을 손으로 밀어 넣었는데 이것이 골로 인정을 받았다. 마라도나는 종료 후 "그것은 내 손의 아니라 신의 손이 넣었다"고 말했는데 오늘날까지 '신의 손'으로 회자된다. 그런데 4분 뒤 믿기 힘든 일이 벌어졌다. 하프라인 부근에서 공을 몰면서 상대 선수 5명을 제치고 골을 터뜨리는 괴력을 발휘했다. 그 활약에 힘입어 아르헨티나의 월드컵 우승을 이끌었다.

펠레-마라도나가 20세기 최고의 축구 선수였다면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는 호나우두와 지네딘 지단의 시대였다. 호나우두는 1994년, 2002년 월드컵에서 브라질 우승 멤버로 이름을 올렸다. 1994년에는 18세라는 경험 부족 때문에 단 1경기도 뛰지 못했지만 2002년 월드컵에서는 8골을 작렬하며 브라질 우승을 주도했다. 1998년 월드컵에서는 4골을 넣었음에도 결승 프랑스전 부진으로 준우승에 머물렀지만 대회 골든볼을 수상했다. 2006년 월드컵에서는 3골을 기록하며 월드컵 통산 최다 득점자(15골)로 등록됐다. 1996-1997-2002년에는 FIFA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으며 특히 1996년에는 20세의 나이에 세계 최고의 선수로 등극했다. 유럽 소속팀에서는 14년 동안 PSV 에인트호번-FC 바르셀로나-인터 밀란-레알 마드리드-AC밀란에서 막강한 공격력을 자랑하며 유럽 최정상급 공격수로 호령했다.

호나우두하면 플레이메이커 지단을 빼놓을 수 없다. 두 영웅은 2002년부터 2006년까지 레알 마드리드 '갈락티코 군단'의 중심으로 활약했다. 지단은 1998년 프랑스 월드컵 결승 브라질전에서 2골을 넣으며 호나우두와의 맞대결에서 승리했고, 프랑스 3-0 승리와 동시에 조국의 첫 월드컵 우승을 맛보게 했다. 유로 2000에서도 프랑스 우승을 이끌었지만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는 부상으로 본선 1~2차전에 뛰지 못하면서 조별리그 탈락의 수모를 겪었다.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는 프랑스의 준우승 멤버로 활약했으며 8강 브라질전에서 빼어난 볼 배급과 화려한 개인기를 과시하며 경기 최우수 선수에 선정됐다. 1998-2000-2003년 FIFA 올해의 선수상에 선정되었으며 현재 레알 마드리드의 고문으로 활동 중이다.

누구도 메시 독주를 저지하지 못했다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축구 선수는 리오넬 메시(아르헨티나, FC 바르셀로나)다. 2008/09시즌 FC 바르셀로나의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 및 트레블(3관왕) 달성을 계기로 지금까지 세계 No.1 자리를 지키고 있다. 당시 챔피언스리그 결승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전에서는 골을 터뜨리며 소속팀 우승을 견인했는데 상대팀 공격수였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와의 맞대결에서 승리했다. 그 이후 호날두의 레알 마드리드 이적으로 지금까지 라이벌 관계를 형성했지만 여전히 흔들림이 없었다. 2009년 FIFA 올해의 선수상, 2010~2011년 FIFA 발롱도르를 수상하며 3년 연속 세계 최고의 자리를 지켰다. 2010/11시즌에는 스페인 프리메라리가-챔피언스리그 우승의 주역으로 활약했고 2011년 12월 FIFA 클럽 월드컵 우승을 이루었다. 2009년에도 클럽 월드컵을 제패했다.

메시는 키가 작지만(169cm) 유럽에서 가장 많은 골을 넣은 선수다. 2008/09, 2009/10, 2010/11시즌 챔피언스리그 득점왕에 올랐으며 올 시즌 대회 득점 단독 선두(14골, 모든 기록은 4월4일 기준)를 달렸다. 4월 4일 챔피언스리그 8강 2차전 AC밀란전에서는 2골을 넣으며 챔피언스리그 시즌 최다 골 타이(14골)를 경신했다. 프리메라리가(36골)를 비롯한 모든 대회까지 합하면 올 시즌에만 58골 터뜨리는 괴력을 발휘했다. 시즌 종료까지 더 많은 골을 추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펠레-마라도나-호나우두-지단에 비해서 월드컵 우승 경력이 없지만 아직 젊기 때문에 지금보다 더욱 위대한 업적을 이룰지 모른다. 지금까지는 누구도 메시의 독주를 저지하지 못했으니까.

*이 글은 북릿에 기고한 글입니다. 북릿은 위즈덤하우스에서 운영하는 전자책 서비스입니다.

By. 효리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