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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아스널, 파브레가스 없지만 윌셔가 있다

 

세스크 파브레가스의 FC 바르셀로나(이하 바르사) 이적은 아스널의 위기를 뜻합니다. 파브레가스가 아스널의 에이스이자 주장이기 때문이죠. 지난 14일 뉴캐슬전 0-0 무승부는 아스널이 파브레가스 공백을 메우지 못했던 결과입니다. 특히 공격을 이끌어갈 적임자가 없었습니다. 아르샤빈-램지가 부진했고, 제르비뉴는 퇴장 당했고, 판 페르시는 부지런한 움직임 속에서도 2선의 제대로 된 지원을 받지 못하면서 끝내 상대 골망을 가르지 못했죠. 그동안 자신의 골 역량을 도와줬던 파브레가스는 더 이상 북런던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진=잭 윌셔 (C) 아스널 공식 홈페이지 프로필 사진(arsenal.com)]

그래서 아스널은 6시즌 연속 무관에 시달렸던 상황에서 프리미어리그 빅4 이탈 가능성까지 제기됐습니다. 파브레가스만 떠나서 그런것이 아닙니다. 가엘 클리시가 맨체스터 시티로 이적했고, 사미르 나스리도 클리시의 뒤를 이어 맨체스터의 하늘색 유니폼을 착용할지 모릅니다. 엠마뉘엘 에부에는 갈라타사라이 이적이 합의된 상황이죠. 키어런 깁스가 클리시 공백을 메울 수 있으나 경험이 아쉬우며, 제르비뉴는 나스리에 비해 피니시가 떨어집니다. 에부에는 만년 백업 멤버였지만 아스널 입장에서는 소금 같은 역할을 해줄 선수를 잃었죠. 반면 빅 사이닝은 제르비뉴(1050만 파운드, 약 185억원) 한 명 뿐이었죠. 명문 구단 위상에 상처를 입을지 모를 고비의 순간이 왔습니다.

최악의 상황이라면 2009/10시즌 프리미어리그 7위를 기록하며 빅4에서 탈락했던 리버풀의 전례를 밟을지 모릅니다. 당시 리버풀의 대표적인 부진 원인은 사비 알론소의 레알 마드리드 이적 공백을 메우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또 다른 요인도 있었지만 누구도 알론소의 빈 자리를 메우지 못했습니다. 2000만 파운드(약 352억원)에 영입했던 알베르토 아퀼라니는 먹튀로 전락하며 다음 시즌 유벤투스로 임대됐죠. 알론소와 파브레가스의 공통점은 중원에서의 정교한 패싱력으로 팀 공격을 이끌어가는 미드필더 입니다. 세부적인 역할은 다르지만 리버풀과 아스널에 없어선 안 될 '패스 마스터' 였습니다.

하지만 아스널은 데니스 베르캄프(아약스 수석코치)의 은퇴 속에서도, 티에리 앙리의 바르사 이적 속에서도 공격의 구심점은 늘 존재했습니다. 지난 뉴캐슬전에서는 파브레가스 공백을 메우지 못했지만 또 한 명의 결장이 아쉬웠죠. 지난 시즌 PFA(프리미어리그 선수협회) 영 플레이어상을 수상했던 19세 신동 잭 윌셔의 영향력이 높아야 할 시점입니다. 윌셔는 2009/10시즌 후반기 볼턴으로 임대되면서 실전 감각을 익혔다면, 2010/11시즌은 아스널의 신성으로 주목 받으며 프리미어리그의 새로운 스타로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올 시즌은 아스널의 새로운 에이스로 올라설 기회입니다.

물론 윌셔는 파브레가스 대체자라고 하기에는 포지션이 다릅니다. 파브레가스가 공격형 미드필더라면 윌셔는 수비형 미드필더 입니다. 볼을 예쁘게 다루는 아스널 공격 옵션과 달리 때로는 투박하면서, 때로는 정교한 플레이를 펼치며 중원에서 다양한 역할을 능수능란하게 소화했죠. 10대 후반의 선수로서 경험 부족을 지적하기에는 아스널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졌습니다. 앙리가 바르사로 떠났던 2007년에는 파브레가스가 팀의 새로운 에이스로 떠올랐습니다. 당시 파브레가스의 나이는 20세 였습니다. 이듬해 가을에는 주장으로 선임되었죠. 젊은 선수들이 즐비한 아스널 특성상, 19세 윌셔가 에이스로 떠오르는 것은 결코 어색하지 않습니다.

윌셔는 수비형 미드필더지만 아스널 공격을 이끌어갈 기질이 발달됐습니다. 중원에서 날카로운 패스를 찔러주면서 팀의 빌드업 속도를 높이고 공격 옵션들에게 골 기회를 밀어주는 성향이죠. 상대 박스쪽으로 접근할때는 동료 선수와 원투패스를 주고 받으며 상대 수비진을 허물어줍니다. 그리고 상대 선수와의 볼 경합에서 이길려는 투쟁심까지 갖췄죠. 공격에 치우치는 경기를 펼치면서 다른 팀에 비해 거친 수비 견제를 받는 아스널이라면 윌셔 같은 싸움닭이 필요합니다. 마치 예전의 웨인 루니(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보는 듯 하죠. 10대 돌풍을 일으켰던 루니의 당돌했던 자취가 지금의 윌셔에게 느껴집니다.

혹시 모르겠지만, 어떤 사람들은 윌셔의 공격 포인트 부족을 아쉬워할지 모릅니다. 윌셔가 지난 시즌 프리미어리그 35경기에서 1골 3도움에 그쳤기 때문이죠. 다른 대회까지 포함하면 49경기 2골 9도움을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수비형 미드필더로 뛰었던 윌셔에게 공격 포인트를 요구하는 것은 발라드 가수에게 댄스를 부탁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지금까지의 윌셔는 동료 선수들의 공격 포인트를 도와주는 역할이었죠. 송 빌롱과 함께 아스널 중원을 주름잡는 살림꾼입니다. 축구에서 패스의 가치를 도움 기록으로 재단할 수 없듯, 지금까지의 윌셔 활약을 공격 포인트로 단정짓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공격형 미드필더 윌셔라면 다를 수 있습니다. 아스널이 만약 파브레가스 공백을 메우는데 어려움을 겪으면서 성적 부진에 빠지면 윌셔의 포지션이 윗쪽으로 올라올지 모릅니다. 윌셔는 지난 시즌 수비형 미드필더로 뛰었지만 그 이전이었던 볼턴 임대 시절에는 4-4-2의 왼쪽 윙어를 맡았고 본래 공격형 미드필더 역할까지 소화할 수 있습니다. 아스널이 지금은 애런 램지를 공격형 미드필더로 키우는 시점이기 때문에 윌셔의 포지션 전환을 기대하기 어렵지만, 팀이 위기에 빠지면 윌셔가 중추적인 역할을 맡을 것임에 틀림 없습니다.

아스널 입장에서 윌셔는 파브레가스보다 더 좋은 조건을 지녔습니다. 윌셔는 잉글랜드 국적 선수로서 앙리-파브레가스 같은 비 잉글랜드 선수처럼 다른 나라 리그로 떠날 가능성이 적습니다. 잉글랜드의 스타급 선수들은 스페인-독일-이탈리아 같은 리그에 진출하는 사례가 적습니다. 과거 잉글랜드 축구의 상징이었던 데이비드 베컴(LA 갤럭시)이 예외적인 케이스죠. 윌셔가 돈 때문에 부자 클럽으로 떠나고 싶다는 마음을 품지 않는다면 10년 후에도 아스널 공격을 주름잡을 잠재력이 있습니다. 스타 선수들의 이적이 활발한 아스널에서는 드문 사례죠. 재정 적자도 착실히 메우고 있습니다. 그만큼 많은 아스널 팬들이 윌셔를 사랑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파브레가스 시대를 청산해야 할 아스널의 앞날 과제는 '윌셔의 시대'가 우승과 꾸준한 인연을 맺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