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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한국 U-20, 그들의 투지는 아름다웠다

 

'아마도 한국이 스페인에게 패하겠지? 뻔할 뻔 이잖아!'

이광종 감독이 이끄는 한국 U-20 대표팀이 16강 스페인전을 치르기 전까지는 이러한 생각을 했습니다. 조별 본선 프랑스-콜롬비아전 패배 및 무기력한 경기 내용에 실망하면서 스페인전에 대한 비관적인 느낌이 가득했죠. 말리전 승리와 조3위 와일드카드 혜택이 없었다면 지금쯤 이광종호는 귀국했을지 모릅니다. 특히 지난 주말 콜롬비아전에서 경기 내내 허술함을 일관하면서 스페인전 대량 실점이 우려됐습니다. '쿠칭의 비극'으로 일컬어지는 1997년 U-20 대표팀의 브라질전 3-10 대패까지 떠오를 정도로 말입니다.

[사진=한국 U-20 대표팀 (C) 아시아축구연맹(AFC) 공식 홈페이지 메인(the-afc.com)]

그런데 스페인전은 저의 예상과 달랐습니다. 스페인전이 시작되었던 오전 7시에 TV 리모콘 전원을 누르면서 리틀 태극 전사들의 플레이를 지켜보며 긍정적인 확신을 얻었습니다. '적어도 국제 망신은 면하겠다'라고 말이죠. 4-4-1-1이 아닌 4-2-3-1로 전환하면서 미드필더 중심의 존 디펜스를 강화하며 상대 공격을 끊는데 집중했습니다. 공격 옵션들이 스페인 진영으로 올라와 포어 체킹을 시도하며 상대 공격 템포를 늦췄고, 스페인이 우리 진영에 접근하면 미드필더들이 협력 수비를 강화하면서 수비수들이 빈 공간을 커버하는 움직임이 활발했습니다. 프랑스-콜롬비아전보다 수비 집중력이 부쩍 좋아진 느낌이 들었죠. 그래서 실점을 안할거라 생각했습니다.

한국의 무실점을 예감했던 이유는 스페인 공격의 세기가 점점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세르히오 카날레스, 호드리고 모레노, 알바로 바스케스 같은 스페인 공격 옵션들이 한국의 끈질긴 수비에 막혔습니다. 상대 미드필더들도 한국의 압박에 주춤하면서 매끄럽지 못한 연계 플레이를 거듭했죠. 상대가 고전할 수록 한국 수비가 스페인 선수들을 매섭게 달려들며 팽팽한 접전이 계속 됐습니다. 스페인 특유의 패스 축구를 차단하려면 전사적으로 대응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우리 선수들이 매우 열심히 뛰어야 했죠. 생중계 시청하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모두가 몸을 내던지는 투지를 발휘했습니다.

가장 마음에 아팠던 것은 후반 막판 및 연장전 이었습니다. 우리 선수들의 다리에 경련이 일어나면서 또는 상대 반칙에 쓰러지면서 몸의 고통을 참으며 뛰어야 했던 상황이 수없이 나타났습니다. 객관적으로 스페인 전력이 우리보다 강하면서, 선수들 개개인의 소속팀 커리어가 화려했던 만큼 우리는 투지 하나로 버틸 수 밖에 없었습니다. 스페인이라는 유럽 강호에게 의기 소침하지 않고 상대와 대등하게 싸우는 굳센 마음 말입니다. 그래서 열심히 뛰어야 했습니다. 아쉽게도 골은 넣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라운드에 나뒹구는 힘든 순간을 참아가면서 스페인전 패배를 어떻게든 막아야했고, 결국 승부차기까지 이어지면서 스페인과 공식 경기상 무승부를 기록했습니다.

한국에게 승부차기 운은 따르지 않았습니다. '제2의 호아킨(스페인 3번 키커를 맡은 코케)'은 있었지만 제3의, 제4의 호아킨은 없었습니다. 일부 누리꾼들은 승부차기에서 실축했던 김경중을 질타하지만, 김경중은 그저 운이 없었을 뿐입니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도 2007/08시즌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 첼시전 승부차기에서 실축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김경중을 비롯한 모든 선수들이 하나로 똘똘 뭉치며 120분 혈전을 무실점으로 마쳤고 승부차기까지 끌고간 겁니다. 우리는 리틀 태극 전사에게 비난할 자격 없습니다.

솔직히 말해봅시다. 한국이 스페인을 이길거라 생각했습니까? 프랑스-콜롬비아전 패배를 놓고 보면 16강에 오른 것 만으로 충분합니다. 물론 스페인을 꺾었으면 더 좋았지만요. 하지만 지동원-남태희-손흥민-석현준 차출이 불발 되었고, 대회 개막을 전후해서 이민선-황도연이 부상으로 대표팀에서 하차 했습니다. 공수 양면에서 구심점 역할을 해줄 선수들을 잃었죠. 스페인전 포백 구성원 중에서 3명은 본래 수비수 주전이 아니었습니다. 이광종호는 전력 약화를 감수하고 16강 고지에 오르며 스페인과 싸워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리틀 태극 전사들은 해발 2150~2650m 고지대에서 U-20 월드컵을 치렀습니다. 경기 장소 만큼은 다른 나라 선수들과 같은 조건 이었지만 일부 주축 선수들이 빠진 한국의 어려움은 배로 컸습니다. 1983년 멕시코 U-20 월드컵 4강 신화를 달성했던 선배들은 고지대에서 자고 일어나면 코피를 흘렸다죠.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도 최선을 다했던 이광종호 입니다. 한국은 16강에서 탈락했지만, 스페인에게 지지 않겠다는 선수들의 투지는 박수 받아야 마땅합니다.

청소년 대회 성적이 자국 축구의 미래를 좌우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느 나라 선수든 청소년 레벨까지는 촉망받는 미래였지만 성인 레벨에서 여러가지 이유로 성장이 정체되면서 끝내 추락했던 인재들이 부지기수였죠. 2009년 가나의 U-20 월드컵 우승을 이끌며 골든볼(최우수 선수)을 수상했던 도미니크 아디야는 어린 나이임에도 여러팀을 전전하는 신세로 전락했죠.

그런데 스페인과 승부차기 접전을 펼친 한국 대표팀 선수들 만큼은 미래가 밝을 것이라는 희망이 생겼습니다. 세계 최정상 축구 실력을 자랑하는 팀을 상대로 대등한 공방전을 펼치며 절대 주늑들지 않았습니다. 과거의 한국 축구는 유럽 강호들과 만나면 기가 죽는 답답함이 있었지만 2002년 월드컵 이후의 청소년 세대들은 선배 세대와 대조적이었죠. 특히 스페인과 싸웠던 선수들은 상대를 거침없는 경기를 펼쳤습니다. 그 마음이 앞으로 변치 않는다면 축구 선수로써 틀림없이 화려하게 성공할 것입니다.

냉정한 관점에서는 이번 대표팀의 전술은 2007년 조동현호, 2009년 홍명보호보다 부족했다는 인상입니다. 스페인을 상대로 잘싸웠지만 프랑스-콜롬비아전 패배의 원인을 생각할 필요가 있죠. 그런데 그 부족함이 스페인전에서 선수들이 단합하는 전화위복의 계기가 됐습니다. 현실적으로 스페인 선수와의 개인 기량에서 밀릴 것임을 미리 인지했습니다. 그래서 선수들은 팀의 위대함을 믿어야 했고 그라운드에서 모든 힘을 다해 움직였습니다. 끝내 이변을 일으키지 못했지만 연장전까지 대등한 경기를 펼쳤던 선수들의 열정이 많은 사람들의 박수 갈채를 받았죠.

이광종호의 '16강 투지'는 전날 밤 일본에게 0-3으로 완패했던 조광래호에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조광래호는 현대 축구의 흐름과 함께하기 위해 패스 축구를 시도하며 기존의 전술을 아기자기하게 풀어가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라이벌 일본 선수들에게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투쟁심이 부족했죠. 정신력을 강조하는 것은 현대 축구에서 구시대적인(?) 발상으로 비춰질지 모릅니다. 하지만 상대를 괴롭히겠다는 승부근성 만큼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한국 축구 고유의 강점이었죠. 정신력이 축구의 전부는 아니지만 실력이 안되면 오기로 버텨야 마땅합니다. 그것이 조광래호와 이광종호의 차이 였습니다.

만약 이광종호가 스페인전에서 프랑스-콜롬비아전에 이은 졸전을 펼쳤다면 조광래호에 이어 국민들의 마음을 답답하게 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스페인전 행보는 당초 예상을 뒤집는 선전을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리틀 태극 전사들의 투지에 감동을 받으며 일본전 패배의 분노를 가라앉히고 한국 축구의 밝은 미래를 기대하게 됐습니다. 한국 축구의 저력을 일깨워준 한국 U-20 대표팀 선수 및 코칭스태프 여러분들,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