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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축구 대표팀 감독 선임, 컨셉부터 잘못 잡았다

 

한국 축구를 이끌어갈 차기 국가 대표팀 감독 선임 작업이 뜻하지 않은 난항에 부딪히고 있습니다. 대한축구협회(KFA)는 얼마전 허정무 전 대표팀 감독의 후계자를 국내파 감독으로 한정지었지만 유력 후보로 거론되었던 감독들이 고사하겠다는 의사를 내비쳤습니다. 16일 오전에는 김호곤 울산 감독이 언론을 통해 대표팀 사령탑 거절 의사를 밝히면서 조광래 경남 감독, 김학범 전 성남 감독이 유력 후보로 남은 상태입니다.

우선, 대표팀 감독은 이번주 안으로 결정 될 예정 이었습니다. 이회택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장은 지난 7일 기자회견에서 "차기 감독 후보로 12~13명이 거론됐다. 다음 주 내 선임 작업을 마칠 계획이다. 모든 기술위원이 차기 사령탑으로 국내 지도자를 뽑자고 의견을 모았다"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회는 지난 14일 감독 선임을 7월 넷째주로 미루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차기 대표팀 감독으로 유력했던 정해성 전 수석코치가 기술위원회에 고사의 뜻을 나타낸 것이 결정타로 작용했습니다. '독이 든 성배'로 표현되는 대표팀 감독직을 맡기가 부담스럽다는 것이 정해성 전 수석코치의 생각입니다.

홍명보 올림픽 대표팀 감독 또한 고사의 뜻을 전했습니다.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 2012년 런던 올림픽 대표팀 감독을 병행하는 상황에서 국가 대표팀 사령탑까지 맡기에는 일이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허정무-베어벡 감독은 각각 2000년 시드니 올림픽,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감독에 아시안게임 사령탑을 병행했지만 결과적으로 뚜렷한 성공을 거두지 못했습니다. 더욱이 베어벡 감독은 아시안게임-올림픽-국가 대표팀 사령탑을 병행하는 과중한 업무와 국내 여론의 부담에 못이겨 2007년 아시안컵 종료 후 한국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대한축구협회는 정해성-홍명보 카드를 포기하고 다른 지도자들을 눈여겨 봤습니다. 하지만 후보로 거론되었던 대부분의 지도자들이 현직에 몸담은 감독들이기 때문에 선임 과정이 쉽지 않아 후보 선정 작업 속도가 더뎠죠. 최강희 전북 감독과 김호곤 감독은 시즌 중에 소속팀을 떠나는 것을 부담스럽게 여기며 대표팀 사령탑을 거절했고 대부분의 현직 감독들도 부담을 느꼈을 것으로 보입니다. 조광래 경남 감독이 현직 감독 중에서 유일하게 대표팀 사령탑에 관심있다는 뜻을 나타냈지만 몇년 전 대한축구협회에 반기를 들었던 경력이 걸림돌로 작용합니다. 지난해 초 대한축구협회 회장 선거에서는 조중연 현 회장을 지지하지 않았던 재야 인사입니다.

여론에서는 김학범 전 성남 감독을 차기 대표팀 사령탑에 적합하다는 목소리를 냈습니다. 김학범 전 감독은 성남 수석코치 및 감독 시절에 뛰어난 지략으로 여러차례 우승을 이끈 '지장'이자 통솔력이 강한 '용장'으로 꼽힙니다. 10년 넘게 유럽 및 남미를 오가며 선진 축구 전술 및 지도력을 습득했던 이점도 작용합니다. 하지만 2008년 11월 이후 감독 경험이 없었던 것, 대표팀 선수 및 코칭스태프 경험이 없는 것 등이 불안 요소로 꼽힙니다. 만약 대한축구협회가 김학범 전 감독을 선택할 의지가 있었다면 지금쯤 감독 선임 작업이 완료되었을지 모르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김학범 전 감독은 스타 선수 출신이 아닌데다 학연의 지지가 부족했던 한계가 있습니다.)

결국, 조중연 회장은 지난 15일 월드컵 대표팀 초청 만찬회에서 "국내외를 막론하고 대표팀 감독 후보자를 찾겠다"며 국내파에 한정짓지 않고 외국인 사령탑도 영입할 의사가 있음을 밝혔습니다. 국내파를 뽑을 계획이었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아 외국인으로 눈을 돌린 것이죠. 대표팀 감독 선임이 컨셉부터 잘못 잡았다는 것을 대한축구협회가 스스로 시인하고 말았습니다.

만약 대한축구협회가 차기 대표팀 감독으로 국내파에 한정짓지 않고 지난주 부터 선정 작업을 시작했다면 지금쯤 유력 후보를 염두했거나 감독을 정식으로 뽑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국내파로 컨셉을 잡으면서 몇몇 지도자들이 고사의 뜻을 전하면서 선임 속도가 늦어지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외국인 지도자까지 범위의 폭을 넓혀야 하기 때문에 대한축구협회의 업무가 늘어나게 됐습니다.

대한축구협회가 컨셉을 잘못 잡은 실수는 이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한국 대표팀은 다음달 11일 나이지리아와의 리턴 매치를 앞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허정무 전 감독의 계약이 만료되면서 새로운 지도자가 나이지리아전을 지휘해야 합니다. 차기 대표팀 감독은 현실적으로 다음주 또는 그 이후에 선임 될 수 있는 상황인데 나이지리아전을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이 부족합니다. 대표팀 감독에 대한 적응 및 선수 파악이 완료되지 않은 상태에서 나이지리아전에 임하는 것입니다. 나이지리아전에서 패하거나 경기 내용이 좋지 않으면 여론의 강력한 비판과 비난에 직면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 분위기가 아시안컵까지 이어지면 감독으로서 큰 부담을 안게 됩니다.

여기에 외국인 감독이 대표팀 사령탑을 맡으면 상황이 더 어렵습니다. 통역 및 한국 축구 스타일 적응이 또 다른 문제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이름있는 외국인 감독을 영입해도 허정무 전 감독의 연봉 7억원보다 더 많은 몸값을 지불해야 하는 문제점도 작용합니다. 더욱이 외국인 감독의 능력이 한국 축구가 원하는 수준에 미달되면 대한축구협회 입장에서 난처롭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쿠엘류 전 감독의 통솔력 부재, 본프레레 전 감독의 전술 부재 였습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브라질의 우승을 이끈 스콜라리 감독도 첼시에서는 지도력 부족의 약점을 이겨내지 못하고 '거듭된 성적 추락'과 맞물려 8개월 만에 경질 됐습니다.

그나마 가능성이 있었던 파리아스 전 포항 감독은 얼마전에 사우디 아라비아를 떠나 아랍에미리트연합(UAE)의 알 와슬 감독으로 부임했습니다. 귀네슈 전 서울 감독은 터키의 트라브존스포르로 떠난지 1년도 되지 않은데다 부인이 터키에 계속 머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지난해까지 K리그에서 외국인 감독 돌풍을 일으켰던 두 명의 외국인 감독은 한국 축구 대표팀에서 볼 수 없는 현실입니다. 아무리 대한축구협회가 외국인 감독들과 접촉하더라도 그들이 거절하면 선임할 수 없습니다. 2007년 하반기의 믹 맥카시 울버햄프턴 감독, 제라르 울리에 전 리버풀 감독이 그 예 입니다.

어떤 일이든 컨셉의 중요성은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집을 지을때 마감 공사보다 기초 공사가 중요하고, 콘크리트 타설보다 측량 및 터파기를 먼저해야 하는 것 처럼, 초기에 일을 시작하는 컨셉이 뚜렷하게 잡히지 않으면 앞으로의 일이 어려워지고 험난해집니다. 대한축구협회의 차기 대표팀 감독 선임은 뜻하지 않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컨셉을 다시 설정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습니다. 하지만 한국 대표팀 감독은 '독이 든 성배'라는 안좋은 인식 때문에 누가 그 성배를 마실지 아직 알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