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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실리 축구' 강세 두드러진 남아공 월드컵

 

월드컵 및 유로대회는 세계 축구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무대입니다. 기본적으로 어떠한 포메이션이 유행했다면 다음 대회에서는 또 다른 포메이션이 대세로 자리잡고, 과거에 수비 축구가 중심이었다면 지금에 이르러 공격 축구가 정착하는 그런 흐름이 유기적으로 변화합니다. 10년 전에 HOT와 젝스키스 같은 남자 아이돌 그룹이 대세였다면 지금은 소녀시대-카라-티아라 같은 걸 그룹들이 열렬한 인기를 받는 것과 마찬가지죠.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는 세계 축구 흐름이 변화하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습니다. 그리스의 유로 2004 우승, 이탈리아-프랑스가 주도했던 2006년 독일 월드컵을 통한 수비 축구가 강세였다면 남아공 월드컵에서는 수비 축구와 다른 컨셉인 실리 축구의 강세가 두드러졌습니다. 수비 축구와 실리 축구는 기본적으로 탄탄한 수비 조직력을 공통점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서로 비슷한 컨셉이 될 수 있지만, 실리 축구는 철저한 선 수비-후 역습을 통해 상대 수비의 허점을 노려 기습공격을 펼치는 이점이 있습니다. 

남아공 월드컵 8강에 진출한 팀 들 중에서 네덜란드, 브라질, 우루과이, 파라과이는 실리축구를 컨셉으로 삼고 있습니다. 가나-독일-아르헨티나-스페인이 기존의 공격 축구를 유지했다면 나머지 네 팀은 기존과 반대되는 스타일을 보였습니다.

실리축구를 펼친 네 팀은 강력한 압박과 짧은 3선 유지를 통한 특유의 짠물 수비로 실점을 막으면서 빠른 역습을 앞세워 단 번에 공격으로 전환하는 팀 컬러로 재미를 봤던 것이죠. 지역 예선 부터 실리 축구를 통해 조직력을 키우면서 본선 8강 고지에 올라섰기 때문에 팀 플레이가 무르익은 상태입니다. 한 명의 특출난 공격 옵션에게 의지하지 않고 그동안 쌓아왔던 팀웍을 통해 공격을 해결하면서 수비를 펼치는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습니다.

특히 네덜란드와 브라질은 지금까지 '막강한 공격력'을 컨셉으로 삼았습니다. 네덜란드는 공격 옵션들의 빠른 발을 앞세운 폭발적인 돌파, 브라질은 화려한 개인기와 정확한 패싱력을 통해 상대 수비를 무너뜨리는 공격 축구를 펼쳤던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두 팀이 남아공 월드컵에서 실리 축구를 택했던 것은 세계 축구의 변화를 읽을 수 있는 결정적 척도로 작용합니다. 네덜란드와 브라질은 남아공 월드컵에서는 수비에 무게를 두면서 실점을 줄이는 쪽에 초점을 모았습니다. 판 마르바이크-둥가 감독이 공격 축구 보다 실리 축구를 선호하는 흐름이 팀 전술에서 반영된 것이죠.

네덜란드는 월드컵 유럽 예선 8경기에서 단 2골을 내줬고 본선 4경기에서는 두 번의 페널티킥 골만 내줬을 뿐 지금까지 필드골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판 브롱크호르스트-마테이선-헤이팅아-판 데르 비엘'로 짜인 포백의 무결점 수비 조직력에 판 보멀-데 용으로 구축된 더블 볼란치가 수비에 힘을 실어주면서 상대의 공격을 틀어막고 있습니다. 특히 커버 플레이가 톱니바퀴처럼 유기적으로 진행되면서 적은 힘을 들이고도 견고한 수비를 펼치는 이점으로 작용했습니다.

브라질의 실리 축구는 공격적이고 역동적인 축구를 원하는 자국 축구팬들이 선호하지 않지만 결과적으로는 둥가 감독이 팀을 잘 이끌었습니다.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 호나우두-아드리아누-카카-호나우지뉴로 짜인 '판타스틱4'의 부조화로 8강에서 좌절했던 아쉬움을 만회하기 위해 수비에 주안점을 두는 조직력 강화로 이어진 것입니다. 네덜란드와 더불어 수비를 강화하는 안정적인 경기 운영을 선호하며, 약점이었던 왼쪽 풀백 문제는 바스토스의 공격적인 흐름을 살리면서 질베르투-주앙이 왼쪽 지역에서 커버 플레이를 늘리는 것으로 해결했습니다.

또한 두 팀의 공격 과정에서 두드러진 공통점이 있습니다. 감각적인 패싱력과 안정된 볼 키핑력을 자랑하는 공격형 미드필더(브라질 카카, 네덜란드 스네이더르)를 보유했고, 좌우 윙어에는 왕성한 활동량과 드리블 돌파를 주무기로 삼는 선수들을 배치하여 측면을 통한 역습 기회를 노렸습니다.(브라질 호비뉴-엘라누, 네덜란드 로번-카위트) 측면 역습에 의존하는 단조로운 흐름을 피하기 위해 공격형 미드필더가 하프라인 부근 및 박스 바깥에서 양질의 패스를 공급하면서, 공격 옵션끼리 간격을 좁혀 상대 수비 뒷 공간을 노리는 역습으로 골을 넣는데 성공했죠.

우루과이와 파라과이의 8강 진출은 지구촌 축구팬들이 예상치 못했던 시나리오 였습니다. 우루과이는 1970년 이후 8강 무대에 서지 못했고 파라과이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8강에 진출하지 못했습니다. 두 팀은 기존에 공격적인 축구를 선호했지만, 축구는 결과로 말하듯 성과가 중요하기 때문에 실점을 줄이는 실리 축구로 방향을 틀었고 8강 진출에 성공했습니다. 지역 방어를 기반으로 삼으면서 상대 공격 옵션을 끈질기게 따라 붙는 대인방어가 혼합하면서 박스 안쪽으로 침투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공격 과정에서는 각각 포를란의 2선 플레이, 측면을 통한 드리블 돌파로 역습의 활로를 개척하며 상대의 수비 허점을 노렸습니다.

두 팀은 투쟁적인 성향의 수비형 미드필더들을 세 명씩 배치했던 공통점이 있습니다. 우루과이는 아레발로-페레스-A. 페레이라(알바로 페레이라) 같은 세 명의 수비형 미드필더를 기용하면서 아레발로-페레스에게 터프한 수비력을 주문하여 상대를 적극적으로 몰아 붙여 공을 따내면서 점유율을 늘렸습니다. 파라과이는 보네트-베라-리베로스로 짜인 미드필더들의 활동량을 늘려 중앙과 측면 이곳 저곳을 거쳐 쉴세없이 압박을 펼칩니다. 보네트-리베로스 같은 공격 성향의 미드필더들이 측면에서 역습을 주도하면서 빠른 수비 전환에 의해 상대 공격을 틀어 막기 위해 부단히 뛰었습니다.

그리고 본선 3전 전패가 유력했던 일본의 16강 진출 비결은 실리축구 정착에 있었습니다. 기존에 즐겨 구사했던 패스를 통한 점유율 축구로는 승리를 보장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월드컵 직전까지 선수들의 지구력을 강화하여 피지컬 부족의 약점을 커버했고, 엔도-아베-하세베로 짜인 미드필더진에게 강력한 압박을 주문했고, 미드필더와 포백의 폭을 좁히는 수비 밸런스를 강화했습니다. 결국 카메룬-덴마크전에서 승리하면서 네덜란드에게 0-1로 패했음에도 경기 내용에서 선전했고, 파라과이에게 승부차기 끝에 패했으나 무실점으로 틀어 막는데 성공했습니다. 남아공 월드컵에서 실리 축구의 강세가 두드러졌음을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대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