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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무명이었던 이정수, '월드컵 영웅' 될 줄 몰랐다

 

'골 넣는 수비수' 이정수(30, 가시마 앤틀러스)가 나이지리아를 상대로 동점골을 넣었을 때, 그동안 이정수가 걸어왔던 축구 인생이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흔히 말하는 엘리트 코스를 거치지 못했고, K리그의 무명 선수였고, 붙박이 주전으로 자리잡았지만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던 무명 선수였습니다. 그랬던 그가 한국의 남아공 월드컵 16강 진출 위업의 주역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이정수는 한국의 16강 진출 달성에 있어 가장 결정적인 기여를 했던 태극 전사였습니다. 그리스전에서 전반 7분 기성용의 프리킥 상황에서 상대 문전으로 침투하여 오른발을 내밀며 공을 골대 안으로 집어넣는 결승골을 기록했습니다. 나이지리아전에서는 전반 24분 0-1로 뒤진 상황에서 기성용의 프리킥을 헤딩에 이은 오른발로 동점골을 밀어 넣었습니다. 공교롭게도 두 번의 골은 이영표가 파울을 유도하던 상황이었고 기성용이 왼쪽 공간에서 프리킥을 올리면서 이정수가 골을 해결짓는 상황 이었습니다.

특히 이정수의 나이지리아전 동점골은 그리스전 결승골이 도돌이표처럼 되풀이 됐습니다. 만약 이정수의 골이 없었다면 한국은 0-1로 불리한 상황에서 나이지리아를 제압하기 위한 공격 과정이 어려웠을 지 모릅니다. 나이지리아와 2-2로 비겼을 때의 2골이 세트 피스 상황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순수한 공격 전개에 의해 골을 넣기가 버거웠죠. 전반 24분 이정수의 골은 한국이 그 이후에 경기 흐름을 장악하면서 나이지리아의 무기력한 경기 운영을 유도하여 파울을 유발했고 후반 3분 박주영이 역전 프리킥 골을 넣는 밑바탕이 됐습니다.

이정수는 한국이 본선 3경기에서 넣은 5골 중에 2골을 넣는 발군의 득점력을 과시했습니다. 웬만한 공격수보다 순도 높은 활약을 펼쳤죠. 한국 축구가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 스페인-독일을 상대로 골을 넣었던 '리베로' 홍명보 이후 16년 만에 월드컵 무대에서 '골 넣는 수비수'를 배출하는 순간 이었습니다. 세계적인 명문 클럽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비디치-퍼디난드 같은 골 넣는 수비수를 보유하여 득점 과정에서 재미를 봤던 것 처럼, 한국 축구도 공격수와 미드필더만 골을 해결짓는 것 뿐만 아니라 수비수도 공격 과정에서 골을 통한 결정적 기여를 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런데 이정수가 월드컵 무대에서 영웅이 될거라 예견한 이는 드물었습니다. 공격수와 미드필더에 비해 주목을 덜 받는 수비수인데다 궂은 역할을 담당하기 때문에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기회가 극히 적습니다. 더욱이 한국은 고질적은 수비 약점을 안고 있었기 때문에 이정수도 그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물론 조용형-강민수보다는 이정수가 더 믿음직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지만 수비 상황에서 순간적인 집중력이 저하되는 문제점이 걱정거리 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월드컵 본선에서 한국의 취약점을 이정수가 속했던 수비진으로 꼽았습니다.

물론 한국의 수비가 월드컵 본선에서 불안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아르헨티나전 4실점 및 나이지리아전 2실점이라는 단순한 수치가 작용했지만, 상대 공격 옵션의 빠른 침투에 흔들리는 경향이 잦았습니다. 그럼에도 한국은 16강 고지에 올랐고 그 주역은 수비수 이정수 였습니다. 한국이 골을 필요로 하는 상황에서 어김없이 골망을 가르며 공격수가 해결짓지 못했던 상황에서 발군의 골 감각을 발휘했습니다. 월드컵에서 자신의 이름을 널리 떨칠 수 있었던 것은 그동안 숨겨졌던 공격수의 재능이 빛을 발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정수는 공격수 출신의 수비수 였습니다. 태성중-이천실고-경희대-안양LG(현 FC서울)에서 공격수로 활약했기 때문이죠. 다부진 체격을 앞세워 공중볼에서 강점을 발휘했던 타겟맨으로서 2002년 프로 무대를 밟았지만 문제는 헤딩 이외에는 그라운드에서 이렇다할 강점을 뽐내지 못했습니다. 당시의 이정수는 타겟맨으로서 상대 수비를 흔드는 움직임이 부족했고 슈팅이 날카롭지 않아 공격수로서의 임펙트가 부족했습니다. 이영표-김동진-최태욱 등과 같은 젊은 선수들을 집중 육성했던 안양의 미래를 빛낼 공격수로 주목 받는 듯 싶었지만 결과는 기대 이하였고 벤치를 전전했습니다.

그래서 이정수는 2003년 부터 공격수에서 수비수로 전환하면서 자신의 축구 인생이 변화되는 중요한 시점을 맞이했습니다. 그동안 골을 노리는 공격수의 임무를 맡았으나 이제는 상대 공격수를 마크하는 수비수의 입장으로 뒤바뀌었기 때문에 어쩌면 포지션 전환 실패로 험난한 축구 인생을 보내야 하는 상황을 맞이했을지 모릅니다. 공격수에서 수비수로 전환했던 것은 김주성-박건하-곽경근 같은 실전 경험이 많은 공격수들이 아니면 성공하기 힘들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결국, 이정수는 조광래 감독(현 경남 감독)의 조련 속에 수비수로서 새로운 길을 걸으며 K리그에서의 성공을 꿈꾸었습니다. 44경기 중에 18경기를 소화했지만 그 경험이 훌륭한 수비수로 성장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하지만 이정수는 이듬해 소속팀에서 이렇다할 출전 기회를 얻지 못해 벤치를 전전했습니다. 안양이 서울로 연고지를 떠나고 새로운 외국인 수비수(브라질 국적의 쏘우자)를 영입하면서 이정수가 출전할 기회가 좀처럼 주어지지 않았던 것이죠. 결국 시즌 중에 인천으로 떠나 장외룡 감독의 품에 안기면서 그때부터 출전 기회가 늘어났습니다. 오른쪽 윙백과 수비수를 오가면서 살림꾼 역할을 충실히했었고 그동안 잠재되었던 대인마크와 저돌적인 움직임, 순간 스피드가 향상되면서 경기 감각이 올라왔습니다. 그러더니 수원 차범근 감독의 눈에 띄면서 2006년 수원 유니폼으로 갈아 입었고 마토-곽희주-송종국과 함께 수비진을 책임지며 2006년 후기리그 우승, 2008년 K리그-하우젠컵 우승을 공헌했고 이듬해 일본 J리그에 진출했습니다.

이정수는 28세였던 2008년 3월 26일 북한전에서 A매치 데뷔전을 치렀습니다. 다른 태극전사들에 비해 성인 대표팀 경기에 첫 출전한 시기가 늦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최고가 되겠다는 꿈을 잃지 않고 끊임없이 정진했기에 그토록 꿈에 그리던 태극마크를 달았고 월드컵 무대를 밟아 한국의 16강 진출의 결정타 역할을 했습니다. 만약 수비수 전환에 실패했거나 지금까지 공격수로 활약했다면 남아공 월드컵 출전이 힘들었을지 모릅니다. 어쩌면 우리들이 기억하지 못하는 무명 선수로 회자되었겠죠. 무명에서 유명 선수가 되기까지 입지전적의 축구 인생을 그리며 월드컵 영웅이 된 이정수의 성공 스토리가 드디어 찬란한 빛을 보게 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