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축구

만약 박지성-히딩크가 월드컵에 없었다면?

 

축구는 결과론에 집착하기 쉬운 스포츠다. 약팀이 강팀을 꺾는 이변이 잦은데다 선수의 해결사적인 기질과 감독의 전술 역량이 승부를 뒤집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경기 종료 후에는 축구팬들 사이에서 '만약 이 상황에서 저 선수를 기용했다면?', '만약 골을 넣지 못했다면?' 같은 결과론적인 생각을 제기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만약'이라는 컨셉을 월드컵에 적용하면 흥미로운 시나리오들을 그려낼 수 있다. 그동안의 월드컵 역사와 전혀 다른 결과가 벌어질 수 있기 때문. '만약 펠레가 없었다면 브라질이 우승하지 못했을 것'과 같은 생각은 지구촌 축구팬들이 머릿속에서 한 번쯤 떠올려봤을 패러다임이다. 이러한 예와 비슷한 패러다임 10가지는 이렇다.

1. 무솔리니가 축구에 관심 없었다면?

이탈리아는 1990년대 초반 무솔리니라는 독재자가 나라를 지배했던 군국주의 국가였다. 무솔리니는 국민들의 신뢰를 얻기 위해 자신이 즐겨 좋아했던 축구를 이용했다. 경기장에서 연설을 하는 것을 비롯, 이탈리아 국민들의 지역감정에 편승해 1929년 세리에A를 출범시켰고, 재벌과 손을 잡아 세계적인 축구 스타를 세리에A로 결집시켜 자국 축구를 활성화시켰다. 그리고 이탈리아가 월드컵에서 우승할 수 있도록 대표팀을 전폭적으로 지원하면서 아르헨티나 출신 선수까지 중용했고, 결국 이탈리아는 1934-1938년 월드컵에서 우승했다. 무솔리니가 축구에 관심 없었다면 이탈리아는 1930년대 세계 축구 패권을 장악하지 못했을 것이다.

2. 히틀러가 무솔리니처럼 축구를 이용했다면?

무솔리니와 같은 시기에 독재자로서 악명을 떨친 사람이 독일의 히틀러였다. 그는 무솔리니처럼 자신의 세력 강화를 위해 적극적으로 축구를 이용하지 않았지만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1938년 월드컵 16강에서 스위스에게 2-4로 패했던 선수들을 전원 구속 시켰기 때문. 하지만 그 당시의 독일 리그는 지금과는 달리 프로리그가 활성되지 않아 잉글랜드-이탈리아-스페인에 비해 레벨이 떨어졌다. 만약 히틀러가 무솔리니처럼 축구를 이용하여 나치즘을 강화했다면 1930년대 세계 축구 역사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졌을 것이다. 어쩌면 독일 축구의 전성기가 일찍 꽃을 피웠을 것이다.

3. 프랑코가 쿠데타를 일으키지 않았다면?

스페인은 월드컵 초창기 시절에 프리메라리가를 활성화시켜 많은 축구 인재들을 길러냈다. 하지만 1936년 군부가 주축이었던 파시즘 진영이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그 수장이었던 프랑코가 국가의 권력을 장악했고 다른 지역까지 점령했다. 그 과정에서 호셉 수뇰 FC 바르셀로나 회장이 프랑코 군부에 암살당하기도. 프랑코는 스페인 국민들의 생활 권리를 제한하자 많은 사람들의 지역감정이 격화됐다. 그래서 축구를 통한 대립각이 심해지면서 프리메라리가가 흥행했지만 스페인 대표팀은 지역감정에 발목 잡혀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없었다. 프랑코가 쿠데타를 일으키지 않았다면 스페인의 월드컵 역사는 지금보다 조금 화려했을지 모른다.

4. 푸스카스-콕시스, 헝가리 국적이 아니었다면?

1954년 스위스 월드컵에서는 푸스카스-콕시스의 위력이 대단했다. 두 선수는 '매직 마자르' 헝가리 부동의 투톱으로 활약해 가공할 공격력을 과시하며 상대 수비수들에게 큰 골칫거리로 여겨졌다. 그래서 헝가리는 두 공격수의 존재감 속에 스위스 월드컵에서 준우승을 달성했다. 하지만 헝가리가 1956년 소련군의 무력 점령을 겪으면서 두 선수는 헝가리 대표팀을 은퇴하고 각각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로 떠났다. 만약 두 선수가 헝가리 국적이 아닌 다른 대표팀에서 한솥밥을 먹었다면 그 팀은 월드컵에서 화려한 역사를 썼을지 모른다. 아울러 1958년 월드컵에서도 두 선수의 모습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브라질 펠레와의 맞대결 여부로 주목을 끌었을지 모른다.

5. 미헬스의 토털 사커가 실패했다면?

네덜란드의 1974년, 1978년 월드컵 준우승 비결은 '토털 사커'라는 혁명적인 컨셉이 있었기 때문이다. 기동력-압박-스위칭의 3박자를 강조하는 포지션 플레이를 통해 다양한 공격 패턴 창출 및 강력한 수비망을 형성하는 진보적인 시스템으로 통해 오렌지 군단의 우수성을 세계에 전파했다. 그래서 몇몇 특급 스타에 의존하던 세계 축구의 흐름이 토털 사커를 통해 변화를 거듭했다. 하지만 토털 사커의 창시자인 미헬스 감독의 전술이 실패했다면 세계 축구의 변화 속도가 무뎠을 것이다. 아울러 토털 사커는 히딩크 감독을 통해 한국 땅에 이식되지 못했을 것이며, 차범근은 레버쿠젠 시절 미헬스 감독에 의해 지도자 수업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6. 마라도나가 이 세상에 없었다면?

한 마디로 끔찍한 시나리오다. 마라도나가 없었다면 세계 축구는 지금처럼 아름답고 화려하지 못했을 것이며 드리블러들이 후한 평가를 받지 못했을지 모른다. 마라도나는 1980년대와 1990년대 초반에 특유의 현란한 드리블 솜씨와 무서운 골 결정력을 자랑하며 세계 축구의 패권을 장악했고 1986년 월드컵에서는 원맨쇼의 저력을 선보였다. 마라도나가 없는 세계 축구는 유재석이 없는 무한도전, 강호동이 없는 1박2일 같은 존재감을 지녔을 것이다. 하지만 남아공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와 상대하는 한국에게는, 전략가의 향기가 없는 마라도나 감독의 존재감이 반가울지 모른다.

7. 이탈리아, 1994년 월드컵 본선에서 탈락했다면?

이탈리아는 1994년 미국 월드컵 결승에서 브라질과의 승부차기 접전 끝에 패했다. 결승 진출의 주역이었던 바죠의 페널티킥이 홈런성 슈팅이 되면서 우승 실패의 역적으로 몰려 이탈리아 국민들의 거센 비난을 감수했다. 하지만 바죠가 없었다면 이탈리아는 준우승은커녕 본선에서 탈락했을지 모른다. 본선 E조에서 3위(1승1무1패)를 기록해 와일드카드로 16강에 올랐기 때문. 노르웨이전 결승골로 이탈리아의 승리를 이끈 선수가 바죠였다. 그럼에도 이탈리아가 본선에서 탈락했다면 바죠는 승부차기 실축의 혹독한 대가를 치르지 않았을 것이다.

8. 마이클 오언, 유리 몸이 아니었다면?

잉글랜드 공격수 오언은 자타가 공인하는 유리 몸이다. 잦은 부상에 시달려 꾸준한 기량을 선보이지 못했기 때문. 2006년 독일 월드컵 파라과이와의 경기 도중 십자인대가 부러졌고 이번 남아공 월드컵에서는 햄스트링 부상 여파로 일찌감치 시즌 아웃 됐다. 만약 오언이 유리 몸이 아니었다면 독일 월드컵에서 발군의 공격력을 선보였을 것이며 남아공 월드컵 맹활약을 벼르고 있었을 것이다. 특히 잉글랜드가 독일 월드컵에서 루니의 무득점 침체로 8강 진출에 만족했음을 상기하면 오언의 부상이 아쉽기만 하다.

9. 히딩크가 한국 대표팀 감독을 거절했다면?

한국 축구의 터닝 포인트는 2000년 연말 히딩크 감독 영입이었으며, 히딩크 감독의 터닝 포인트도 한국 대표팀 감독 수락이었다. 한국 축구는 히딩크 감독의 존재감 속에 체질 개선에 박차를 가한 끝에 지금까지 선진 축구 흐름을 활발히 받아들여 경쟁력을 강화했다. 히딩크 감독은 한국의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 진출을 이끈 이후 여러 팀에서 승승장구를 거듭하며 오늘날까지 세계적인 명장으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히딩크가 한국 대표팀 감독을 거절했다면 90년대 말 스페인에서의 실패를 만회하는데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을 것이며 한국 축구의 발전도 요원했을 것이다. 아울러 박지성-이영표의 유럽 진출도 없었을지 모른다.

10. 박지성이 명지대에 입학하지 않았다면?

박지성은 명실상부한 한국 축구의 에이스다. 하지만 다른 유명 선수들처럼 엘리트 코스를 걸어오지 못했다. 수원공고 시절 어느 모 프로팀의 입단 테스트에서 탈락했고, 그토록 갈망했던 고려대 입학은커녕 대학팀들의 퇴짜까지 맞고 말았다. 당시 명지대 사령탑을 맡았던 김희태 감독의 눈에 띄면서 대학 축구 입성을 눈앞에 두었으나 문제는 축구부원을 모두 뽑은 상태였다. 다행히 테니스부 정원이 1명 모자라면서 간신히 명지대에 입학했지만, 이것마저 좌절되었다면 우리는 박지성의 성공 스토리를 보지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한국 축구는 지금까지 유럽 빅 클럽 선수를 배출하지 못했으며 허정무호의 7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도 장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글은 Daum 스포츠 남아공 월드컵 특집 매거진에 실렸으며 Daum측의 허락을 받고 게재함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