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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월드컵]이승렬에게 '2002년 박지성' 향기가 난다

 

2002년 5월 26일 한국-프랑스전. 한국은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앞두고 '세계 최강' 프랑스와 평가전을 가졌습니다. 경기 초반 트레제게에게 선제골을 허용하면서 어려운 경기가 될 것으로 보였으나 전반 26분, 김남일이 하프라인 부근에서 띄워준 전방 킬패스를 박지성이 상대 수비수를 제치고 왼발 인스텝슛으로 골망을 흔들었습니다. 당시 박지성은 자신의 골을 통해 그동안 자신을 과소평가했던 여론의 반응을 뒤엎은 것을 비롯 한일 월드컵 맹활약의 자신감을 키웠습니다.

이러한 박지성의 골 상황은 8년 뒤의 이승렬에게서 그대로 재현됐습니다. 이승렬은 지난 16일 에콰도르전에서 후반 28분 염기훈이 하프라인 부근에서 떨군 백헤딩 패스를 받아 상대 수비수를 제끼고 어떠한 망설임없이 왼발로 결승골을 넣으며 한국의 2-0 완승을 이끌었습니다. 에콰도르전 승리의 주역으로 거듭난 이승렬의 골은 8년 전 프랑스 골망을 흔든 박지성의 골 장면과 흡사했습니다. 박지성의 슈팅 궤적이 빨랫줄처럼 뻗었고 이승렬의 슈팅이 인스텝보다는 땅볼로 향했던 차이점을 감안하더라도, 이승렬의 골은 2002년 박지성의 향기가 납니다.

공교롭게도 박지성은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의 나이가 21세이며 이승렬도 올해 나이가 21세입니다. 박지성은 한일 월드컵 최종 엔트리 발표 이전까지 언론으로부터 최종 엔트리 탈락 1순위로 꼽혔으며, 이승렬도 에콰도르전 이전까지 허정무호에서의 앞날을 보장받지 못했습니다. 두 선수는 멀티 플레이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박지성의 멀티 능력은 두말 할 필요 없고, 이승렬은 좌우 윙어와 투톱 공격수를 소화할 수 있는 양발잡이 입니다. 또한 두 선수는 허정무 감독이 발굴하고 성장시켰던 선수들입니다. 닮은 점들이 여럿 있는 두 선수입니다.

물론 박지성과 이승렬의 스타일은 다릅니다. 박지성이 넓은 활동 폭과 부지런한 움직임을 주무기로 기동성에서 강점을 발휘하는 성향이라면 이승렬은 드리블 돌파를 즐기는 선수입니다. 또한 박지성은 전형적인 미드필더이며 이승렬은 미드필더를 겸할 수 있지만 실제 포지션은 공격수입니다. 박지성이 이타적인 플레이에 많은 비중을 두는 선수라면 이승렬은 이타와 이기를 적절하게 섞으며 상대 수비를 교란합니다.

하지만 박지성의 2002년 행보를 되돌이켜 보면, 이승렬이 한국 축구의 10년을 빛낼 존재로 거듭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한국이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 신화의 원동력 중 하나로 박지성의 선전이 있었던 것 처럼, 허정무호가 남아공 월드컵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려면 이승렬이 분발해야 합니다. 대표팀의 젊은피가 중요한 경기에서 기대 이상의 활약을 펼친다면 동료 선수들의 사기가 하늘위로 치솟을 것이며 월드컵 성적의 긍정 포인트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승렬의 성장은 더 나아가 대표팀의 남아공 월드컵 이후의 행보를 밝게하는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동안 이승렬의 단점으로 지적되었던 것이 골 부족 이었습니다. 2008년 프로 데뷔 이후 지금까지 K리그에서 67경기 15골 4도움을 기록했고 데뷔 시즌에 신인상을 수상했지만 골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과소 평가 되는 경우가 잦았습니다. 지난해에는 드리블 위주의 경기 운영이 상대팀 선수들에게 읽히면서 주전 확보에 실패했고 그 여파로 올해 초 대표팀 해외 전지훈련까지 영향을 끼치면서 허정무 감독에게 호된 꾸지람을 받았다고 합니다. 대성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었으나 이승렬이라는 이름 석 자를 사람들에게 각인시킬 수 있는 임펙트가 아쉬웠죠.

하지만 이승렬은 지난 2월 14일 일본전 역전 결승골, 이번 에콰도르전 결승골을 통해 허정무호의 새로운 해결사로 거듭났습니다. 일본전에서 왼발 중거리슛으로 상대 골망을 가르는 통쾌한 골 장면을 선보였다면 에콰도르전에서는 상대 수비수를 제끼는 타이밍이 빨랐고 슈팅까지 깔끔했던 교과서적인 골 장면 이었습니다. 그것도 어떠한 망설임 없이 왼발로 골망을 갈랐던 것은 마음속에 내제된 자신감이 충만함을 의미합니다. 불과 몇 년 전까지 한국 공격수들의 고질적인 문제가 박스 안에서의 울렁증 이었는데, 이승렬에게는 이러한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실제 이승렬은 투쟁심이 있는 선수입니다. 이천수 같은 전형적인 싸움닭은 아니지만 젊은 선수 답지 않게 침착하게 경기를 풀어가는 성향입니다. 그러면서 상대팀 선수와의 몸싸움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정면 경합을 벌이거나 몸을 던지며 공을 끝까지 지키는 욕심이 충만합니다. 이것은 이승렬이 심리적인 컨트로를 잘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월드컵 본선 같은 큰 무대에서 경험 부족으로 흔들리지는 모르겠지만, 에콰도르전 결승골 과정에서 두둑한 베짱을 부렸던 이승렬이라면 월드컵 본선에서 강한 상대와 만나도 주늑들지 않을게 분명합니다.

그런 이승렬은 다득점에 능한 선수가 아니지만 극히 부진한 경기가 없었을 만큼 전반적인 경기력이 꾸준합니다. 항상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려는 모습이 역력했고 상대 수비수의 집중적인 견제를 받으면 다른 곳으로 이동하여 공을 따내고 재차 공격을 연결하는 영리한 경기 운영을 펼칩니다. 상대 수비 공간이 열려있을때는 과감한 중거리슛을 시도하며, 박스 안에서 알토란 같은 골을 넣으며 공격의 첨병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상대 수비수를 뒤흔드는 타입이기 때문에 타겟맨과의 연계 플레이에 능한 이점이 있습니다.

이승렬의 최종 엔트리 합류는 사실상 확정이라고 봅니다. 어쩌면 월드컵 본선에서 안정환과 함께 슈퍼 조커로서 맹활약을 펼칠지 모를 일입니다. 본선 무대에서는 최전방에 박주영-이동국 투톱 또는 박주영 원톱 체제가 유력하고 측면에 박지성-이청용이 있기 때문에 이승렬이 주전으로 비집고 나올 돌파구가 없습니다. 하지만 슈퍼조커는 언제 어느 상황에서든 골을 결정짓는 능력이 있어야 하며 박스 안에서 어떠한 흔들림없이 경기를 운영해야 합니다. 안정환만으로 부족하다면 이승렬 카드도 제법 매력적입니다.

하지만 이승렬은 월드컵 본선에서 주전으로 뛰어도 손색없는 경기력을 발휘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박주영이 잦은 부상에 시달린데다 최근 허벅지 부상 이후 폼이 올라오지 못했던 문제점이 허정무호에서 그대로 이어지면 그의 공백으로 이승렬이 적절한 카드로 떠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근호-안정환이 이동국과의 공존에 실패했고(본프레레 체제에서 안정환-이동국 투톱이 실패했죠. 허정무 감독도 두 선수의 투톱 배치에 부정적으로 언급했습니다.) 이근호의 공격력이 1년 동안 침묵에 빠졌다는 점에서 오히려 이승렬에게 선발 출전 기회가 열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박주영의 슬럼프를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박주영의 폼이 올라오지 못하면 허정무호 전력 손실을 대비하기 위한 차선책이 필요합니다. 그 차선책이 바로 이승렬입니다. 이름값에서는 박주영-이동국-이근호에게 무게감에서 밀릴지 모르지만, 최근에 폼이 오른것을 미루어보면 다른 누구보다 실속이 강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행보는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앞두고 있던 박지성을 떠올리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