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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첼시 8번vs리버풀 8번, 엇갈린 희비 왜?

 

프랭크 램퍼드와 스티븐 제라드는 라이벌 관계로 유명합니다. '칼라더비' 라이벌 관계로 유명한 첼시와 리버풀의 주력 선수이자 스타일 및 포지션이 비슷한 잉글랜드 출신 미드필더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첼시와 리버풀에서 등번호가 8번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 칼라 더비에서는 두 명의 8번 선수 활약상에서 승부의 희비가 엇갈렸습니다.

램퍼드가 속한 첼시가 2일 저녁 9시 30분(이하 한국시간) 안필드에서 열린 2009/10시즌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 37라운드 리버풀 원정에서 2-0의 값진 승리를 따냈습니다. 전반 33분 제라드의 백패스가 디디에 드록바의 결승골로 이어졌고 후반 9분에는 램퍼드가 추가골을 넣으며 첼시가 원정에서 승리했습니다. 이로써, 첼시(승점 90)는 2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89)와 승점 1 차이를 유지했고 오는 10일 오전 1시 홈에서 열릴 위건과의 최종전에서 승리하면 프리미어리그 우승이 확정됩니다.

램퍼드 '명불허전' vs 제라드 '백패스만 아니었다면'

이번 칼라 더비는 첼시에게 불리할 것으로 보였습니다. 최근 4번의 리버풀 원정(프리미어리그 기준)에서 2무2패로 부진한데다 리버풀이 올 시즌 프리미어리그 홈 경기에서 13승3무2패를 기록해 원정 경기 5승5무8패와 대조되는 행보를 나타냈기 때문입니다. 또한 리버풀은 올 시즌 성적 부진에 시달렸으나 명문 클럽으로서의 가치와 위상을 지키기 위해 첼시를 이겨야 하는 사명감이 작용했습니다. 그래서 첼시는 리버풀전이 우승의 최대 고비로 작용했습니다.

그런데 첼시의 리버풀전 승리 과정은 예상외로 순조로웠습니다. 제라드의 백패스가 승부의 결정타로 작용했었지만, 공격 컨셉이 경기 초반부터 상대팀의 수비를 흔들었기 때문입니다. 첼시는 지난 주말 스토크 시티전에서 7-0 대승을 거둔 선발 스쿼드를 리버풀전에 그대로 출전 시켰습니다. 아넬카-드록바-칼루로 짜인 3톱, 램퍼드-발라크-말루다로 구성된 미드필더를 앞세운 4-3-3을 들고 나왔습니다. 공격 과정에서 스위칭이 잦아지면서 공격수가 미드필더, 미드필더가 공격수 역할을 하는 파상적인 공격을 펼치며 상대 수비를 흔들었습니다.

아넬카와 칼루는 4-3-3의 좌우 윙 포워드 였습니다. 하지만 리버풀전에서는 윙 포워드 뿐만 아니라 중앙에서 공격형 미드필더 역할을 소화하면서 말루다-램퍼드의 공격 가담을 늘려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하프라인쪽으로 접근하여 공을 잡아 아게르-마스체라노로 짜인 리버풀 좌우 풀백의 움직임을 앞쪽으로 끌어내린 뒤, 말루다-램퍼드가 상대 풀백의 뒷 공간으로 파고들거나 드록바와 간격을 좁히는 형태의 공격으로 상대를 공략했습니다. 그래서 말루다는 하프라인과 최전방을 오가는 프리롤로 리버풀의 공수 밸런스를 끊었고, 램퍼드는 적극적인 공격 가담에 따른 슈팅으로 상대의 기세를 빼앗으며 첼시의 경기 흐름 장악을 유도했습니다.

이러한 첼시의 일방적인 공격 주도에 리버풀이 흔들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오른쪽 풀백으로 전환한 마스체라노가 첼시 공격 옵션들에게 뒷 공간을 자주 허용하는 문제점을 드러내면서 여러차례 실점 위기를 허용했기 때문입니다. 전반 33분 이전까지는 골키퍼 레이나의 안정적인 선방이 있었기에 무실점으로 버틸 수 있었지만 제라드의 백패스가 결국에는 리버풀 패배의 빌미로 작용했습니다. 제라드는 전반 33분 첼시의 전방 압박 때문에 패스 받을 공간을 찾지 못하면서 레이나에게 백패스를 연결했으나 이것이 드록바의 발에 걸리면서 여지없이 선제골을 허용합니다. 이 장면은 첼시 승리-리버풀 패배의 결정타로 작용 했습니다.

제라드는 이날 경기에서 많은 짐을 짊어졌습니다. 루카스와 함께 더블 볼란치를 맡아 중원을 맡았는데, 원톱 카윗과 2선 미드필더(베나윤-아퀼라니-막시) 끼리의 유기적인 공격이 살아나지 못하면서 직접 2선으로 올라가 공격을 전개하는 역할까지 도맡았습니다. 아퀼라니와의 활동 반경이 겹치는 문제점이 있었지만, 아퀼라니가 발라크에게 막혀 공격 구심점 역할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아퀼라니의 뒷 공간에서 동료 선수들에게 공격의 활로를 열어줬습니다. 여기에 마스체라노가 첼시 왼쪽 공격 봉쇄에 실패하면서 수비 부담이 늘어날 수 밖에 없었고, 평소보다 많은 움직임과 활동 폭을 요구받게 됐습니다.

이 과정에서 제라드에게 집중력 부족의 문제점이 따릅니다. 올 시즌 제라드의 문제점은 경기 몰입이 약했다는 점인데, 동료 선수들과 끊임없이 패스를 주고 받으며 슈팅 기회를 노리는 스타일이 올 시즌 들어 지속적이지 못했습니다. 전반 33분 리버풀에 실점을 안겼던 백패스는 시야 확보 실패를 비롯 경기 상황에 따른 집중력이 떨어져 있었음을 말해주는 장면 이었습니다. 골키퍼에게 백패스를 시도했던 것 자체가 제라드 답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이날 경기의 패배를 제라드 한 명에게 돌리기에는 부족함이 있습니다. 제토라인(제라드-토레스)가 없는 리버풀의 공격진이 허약했기 때문입니다. 원톱 카윗은 기동력이 뛰어난 선수인데 좁은 공간에서의 움직임이 살아나지 못했고 아퀼라니와의 간격을 좁히는데 실패했습니다. 아퀼라니는 공격형 미드필더로서 패스 22개에 그칠만큼, 제라드만큼의 공격 주도를 보여주지 못했고 측면 옵션인 베나윤-막시가 측면 활로 개척에 실패하면서 경기 흐름이 첼시에게 기울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에 수비까지 불안했으니, 제라드가 힘든 경기를 펼칠 수 밖에 없었고 백패스까지 범하면서 패배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반면 '제라드의 라이벌' 램퍼드는 칼라더비에서 명불허전의 공격력을 과시했습니다. 올 시즌 35경기에서 21골을 몰아쳤던 극강의 공격력이 리버풀전에서도 불을 뿜었기 때문입니다. 후반 9분 아넬카가 오른쪽에서 낮게 올린 크로스를 문전 중앙에서 받아 오른발로 상대 골망을 흔들었습니다. 적극적인 공격 가담 및 슈팅을 통해 상대 기세를 흔들었던 결과가 골이라는 값진 보상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특히 문전 앞에서 동료 선수의 패스를 받는 능동적인 움직임 및 적절한 위치선정을 통해 공을 받아 슈팅 타이밍을 노리거나 전방쪽으로 질주하는 특유의 공격 패턴이 리버풀전에서 빛을 발했습니다.

램퍼드의 리버풀전 맹활약 원동력은 아넬카-칼루라는 조력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두 명의 윙 포워드는 포메이션 상으로는 램퍼드보다 더 위에 있는 선수들이지만, 경기가 진행되면 미드필더쪽으로 내려와 상대 수비를 앞쪽으로 끌어올리며 램퍼드-말루다로 짜인 공격형 미드필더의 종적인 움직임을 유도합니다. 이 과정에서 램퍼드-말루다에게 많은 슈팅 기회가 주어질 수 밖에 없었고, 첼시가 시즌 후반들어 골 넣는 공격축구를 앞세워 다득점을 펼칠 수 있었던 계기가 좌우 윙 포워드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램퍼드는 슈팅 상황에서의 강력한 임펙트까지 장착하면서 많은 골들을 생산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램퍼드는 리버풀전에서 직선과 곡선의 공격 패턴을 적절히 섞으며 상대 중원을 흔들었습니다. 주로 오른쪽 진영에서 공을 잡아 다양한 형태의 패스를 뿌리며 루카스의 견제를 따돌렸는데, 이것은 첼시의 공격이 어느 한 선수에 의존하지 않고(리버풀이 제라드에 의존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측면과 중앙을 골고루 섞는 패스 플레이가 오래전부터 정착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첼시는 종방향의 짧은 패스 뿐만 아니라 좌우로 넓게 벌려주는 패스를 통해 상대 수비 뒷 공간을 공략하며 승리의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이러한 첼시의 조직적인 플레이에서 램퍼드가 골을 넣으며 피니시의 정점을 찍었고 제라드와의 맞대결에서 승리했습니다.